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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규 이야기

6·25 예순 여섯 돌을 경건하게 보내려 했는데 초등학교 동창 철규와의 약속 날자가 하필 이날 저녁으로 잡혔다.  막역한 사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20 여년 이상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가끔 전화로만 목소리를 들어오던 터였다. 저녁 6시 반 서울대입구역에서 만났다. 살이 조금 빠지긴 했어도 옛모습 그대로였다.

 

친구가 일식집에 들어가 술 한잔 하자는 걸 내가 손목을 잡고 나와 인근의 돼지갈비집으로 갔다.  일식집 테이블이 요리사를 바라보고 빙 둘러앉는 형태라 마음에 들지않았다. 우리들만의 사적인 대화를 요리사들까지 엿듣는다는게 불쾌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돼지갈비 굽는 냄새와 연통을 타고 피어오르는 회색빛 연기가 역시 내 수준에 맞는 듯 했다. 난 철규가 그간 무엇을 했는지, 또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냈는지 그 기나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도록 했다.

 

사실 우리 나이가 되면 상대방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으려하지 않는다. 모두 자기 얘기 하기에 바쁘다. 난 철규의 본인 얘기뿐만 아니라 주변에 알고 있는 동창들 얘기까지 부탁했다.  상대방 이야기에 추임새까지 넣어 가면서 우린 장구한 세월 속으로 빠져들었다.  철규의 얘기부터 풀어볼까 한다.    

 

1) 철규 이야기

철규는 공부를 잘 해서 대학도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많이 번, 소위 말하는 성공한 화이트 칼라 같은 친구는 아니다.  철규의 공식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엄마와 함께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를 시작했다.  소위 이동주부라는 것이다. 35사단이 바로 옆에 있고 사격장, 훈련장이 멀지 않아서 집안이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대개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군인들을 상대로 빵이며, 과자, , 막걸리 등을 파는 장사를 했다. 

 

나도 실은 건강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을 다니지 못하고 2년 동안 장사를 했는데 철규는 바로 동창이자 장사판 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님은 손바닥만한 논밭을 짓고 있었는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그의 어머니는 철규를 데리고 이동주부 장사를 시작하셨다.  철규는 장사를 하면서도 저녁에는 야학을 다녔는데, 당시 동사무소 한켠에 학생들이 스스로 흙벽돌을 쌓아 작은 교실 두 칸을 마련했다. 야학이 사정으로 문 닫을 무렵 나는 어렵사리 중학교에 진학을 했고, 철규는 아버지가 중학교에 가지말고 한자를 익히라 해서 천자문을 공부했다. 

 

그는 몇 년 후 서울에 올라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법률사무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당시엔 젊은이들이 한자를 잘 모를 때라 철규가 학력은 비록 국졸이었지만 한자 투성이의 법률서류를 다루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사무소 일을 조금 배우고 나니 사건 의뢰 건에 대한 요약보고서도 곧 잘 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내부적으로 상당한 신임을 얻게 되었단다.

 

70년대 후반에는 중동에  건설붐이 일어 젊은이들의 엉덩이가 들썩들썩 할 때였는데  그도 건설회사에 들어가 리비아와 사우디 아리비아에서 4년간 근무를 했다. 그때 비록 고생은 많았지만 돈을 상당히 벌었고 덤으로 중동여자도 사귀어 귀국 시에 이 여자가 콜롬보까지 따라왔었다나...  이거 부러워해야 할지, 손가락질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때 번 돈으로 서울 근교에 집을 샀고, 전주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데려왔다. 

 

이 후 건설회사를 그만 두고 조경에 관심을 가지면서 조경기술 학원을 다녔는데  다행히 조경기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조경업체에 취직을 했다, 지금은 친구와 함께 중소 규모의 조경업체를 만들어 시청과 구청의 조경공사를 수주받아 상당한 돈을 벌었다. 물론 그동안 아는 사람한테 사기를 당해 7억원을 날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돈벌이는 잘 되고 있어서 우리처럼 노후 걱정은 없다고 한다. 

 

형광등 불빛으로 그의 이마와 콧날이 밝에 빛났다. 구리빛으로 검게 타긴 했지만 이순을 넘은 얼굴 치고는 상당히 젊어 보였고 특히 먼 옛날 소년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았다. 아마 열심히 살다보니까 나이들 틈을 주지 않았나 보다. 나도 나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이 친구 얘기를 듣다보니 괜히 어깨가 움추려들고 왜소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앞으로도 지금 처럼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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