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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신춘문예] 래빗 쇼 - 이상희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꼬르따사르는 벌써 한 달째 토끼를 토하지 않았다. 임신부처럼 불룩 튀어나온 뱃속에는 네다섯 마리의 토끼가 뒤엉켜 있었다. 그는 토끼를 토하지 않으면서부터 클로버 잎사귀만 먹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을 둥글게 말고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이따금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는 베갯머리에 떨어져 있는 클로버 잎을 주워 들고, 꼬르따사르의 뱃가죽이 우둘투둘 일렁이는 것을 쳐다보았다.
“토끼는?”
재오가 물었다. 어제도 잠을 못 잤는지 얼굴이 까칠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꼬르따사르에게 다가가 배를 눌렀다. 어떻게 해서든 토끼를 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꼬르따사르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토끼를 토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제기랄.”
재오는 꼬르따사르의 야윈 몸을 내팽개치듯이 밀치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꼬르따사르는 배를 움켜쥐고 신음소리를 냈다. 뱃속에서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꼬르따사르를 쳐다보면서 클로버 잎을 씹었다.
꼬르따사르가 나타난 것은 반년쯤 전이었다. 재오는 손님 하나 없는 가게에서 어깨와 팔꿈치에 덕지덕지 파스를 붙이고 칵테일을 만들었다. SNS에 재오가 만든 칵테일을 나쁘게 평하는 글들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바 테이블 위에 재오가 만든 연습용 칵테일 열 잔이 나란히 놓였다. 나는 그것들을 쳐다보면서 얼마 남지 않은 보증금을 헤아렸다.
보증금은 재오의 퇴직금과 내 등록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재오는 수년간 일한 광고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고, 나는 미래도 없는 대학원 생활이 지겨웠다. 재오는 자신이 다니던 단골 바가 싼값에 나왔다면서 함께 바를 운영하자고 했다. “일종의 살롱이지. 우리는 단지 술을 파는 게 아니라, 예술과 학문, 그러니까 지성인들의 교류를 파는 거야.” 그 말에 설득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드넓은 해변에서 작은 조개껍데기를 발견하는 일을 학문의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보다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재오가 핏줄이 선 눈알을 힘겹게 굴리면서 열한 번째 칵테일을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마티니 잔을 집어들었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재오는 출입문을 슬쩍 쳐다보더니, 코스모폴리탄을 마셨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거푸 칵테일을 들이켰다. 알코올이 천천히 혈액에 스며들었고 긴장된 근육이 이완되었다. 그러면서 중력에 매여 있던 영혼이 대기 중으로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나는 책장을 훑어보았다. 뽀얗게 먼지 덮인 책들이 꼼짝없이 줄지어 있었다. 한 권씩 제목을 읽어내려 가다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단편집을 뽑아들었다. 언젠가 지도교수가 준 책이었다. 재오는 책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했다. 나는 마티니를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적셨다. 내가 고른 작품은 토끼를 토하는 괴상한 남자가 아파트를 빌려준 앙드레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글이었다. 나는 앙드레의 아파트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기분으로, 책에 적힌 활자를 발음했다. 재오의 얼굴이 꿈을 꾸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주인공은 앙드레의 아파트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부터 토끼를 토했다. 보통 5~6주에 한 번꼴로 토끼를 토했는데, 앙드레의 아파트에 머물렀던 한 달 동안은 무려 열한 마리의 토끼를 토했다. 토끼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고 책을 갉아먹고 오래된 도자기를 깨뜨렸다. 주인공은 번역과 집필에 몰두하다가도 토끼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열한 번째 토끼를 토한 날, 주인공은 차창 밖으로 어슴푸레 해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편지를 마쳤다.
“인도 위에 널브러진 열한 마리의 토끼를 수거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토끼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또 다른 주검을 얼른 치워야 할 테니까요.”*
재오는 눈을 감고 칵테일의 너저분한 맛을 음미하다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죽은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섬세한 예술가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마치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마지막 문장 뒤에 또 다른 문장을 이어 붙였다.
“물론 주검처럼 보이는 그것은 청소부가 오기 전에 슬며시 일어나 다른 세상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남동, 바 노웨어로 말입니다.”
책장을 덮었다. 추락하는 남자를 중간에 낚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운 피로가 온 몸을 뒤덮었다. 나는 한 모금 남은 칵테일을 마저 마셨다. 입술이 타들어갈 듯 쓰라렸다.
그 때문에 매달린 종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고, 나이트가운을 입은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남자가 꼬르따사르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꼬르따사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끅끅대는 소리를 내더니 토끼를 토했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온 것처럼 보통 토끼보다 작은 하얀 토끼였다. 꼬르따사르는 두 손으로 황급히 토끼를 가리고 모히토를 주문했다. 재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민트를 빻았다. 나는 꼬르따사르를 훔쳐보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토끼가 즐거워 보이네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그 멍청한 대사를 연습하면서 탱고를 틀었다.
“지드 번역을 아직 못 끝냈는데 말이죠.”
꼬르따사르는 여전히 앙드레의 아파트 구석에 처박힌 원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불안하게 손가락을 까딱이자, 엄지와 검지 사이로 토끼가 머리를 내밀었다. 재오는 귓속말로 “꼬르따사르가 헤밍웨이쯤 되는 건가?”라고 묻고는 저 혼자 히죽거렸다. 나는 그가 며칠 전 함께 보았던 여행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헤밍웨이가 단골로 찾았다는 바에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는 듯했다.
“헤밍웨이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에 있지만, 당신의 모히토는 바 노웨어에 있지요.”
재오가 꼬르따사르에게 모히토를 내밀었다. 꼬르따사르는 삐져나온 토끼 머리를 엄지로 살짝 눌러 손바닥 안으로 밀어넣고, 모히토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모히토를 빨대로 쭉 빨아서 한 모금 삼키고 나서는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이어서 마르가리타 한 잔과 럼주 반병을 마셨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꼬르따사르의 손에서 벗어난 토끼는 바 테이블 위를 깡충깡충 뛰었다. 토끼의 발밑으로 몽롱하고 눅진한 공기가 느리게 흘렀다. 토끼가 꼬르따사르 앞에 멈추어 작은 귀를 쫑긋거렸다. 꼬르따사르는 토끼를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었다.
“굉장하지요. 어떻게 이런 게 내 안에 들어있을 수 있을까요. 마치 한 편의 시 같지 않습니까? 보드랍게 드러누운 밤이 차곡차곡 쌓이면 이렇게 하얗고 빛나는 것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꼬르따사르가 말했다.
“아주 귀여운 토끼예요.”
“정말이지 이런 토끼는 처음 봅니다.”
재오와 나는 꼬르따사르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꼬르따사르는 한참 동안 토끼를 들여다보다가 발작적으로 움켜쥐었다.
“그런데 말이죠. 혹시…… 내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꼬르따사르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던져진 갓난아기나 다름없었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에게 할당된 이름은 없었다. 가브리엘이나 호르헤 같은 흔한 이름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이름들을 조용히 혓바닥 위에 굴리고 있을 때, 재오가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요. 꼬르따사르씨.”
재오는 꼬르따사르의 모히토가 어쩌고 하는 카피를 SNS에 올렸다. 이제 두고 볼 일만 남았다고, 수완 좋은 장사꾼처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 두고 볼 것도 없이 그의 수완은 통하지 않았다. 꼬르따사르가 헤밍웨이쯤 되길 바랐던 재오의 바람과 달리 사람들은 꼬르따사르가 누군지 몰랐다. 당연히 꼬르따사르가 마신다는 모히토를 마시고 싶어 할 리도 없었다.
꼬르따사르는 우리가 사는 낡은 빌라에 얹혀살았는데, 그와 함께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쓸데없이 말이 많았으나 정작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했다. 또 마땅히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눈치껏 무언가를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바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끼적일 뿐이었다. 재오와 내가 손님을 상대하고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닦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거기 그런 말은 안 쓰여 있나 봐?” 재오는 그렇게 비아냥거렸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꼬르따사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일을 돕는 시늉 역시 하지 않았다.
꼬르따사르가 우리와 함께 지낸 지 한 달 반쯤 되었을 때였다. 그때는 이미 토끼가 열한 마리로 불어난 후였고, 바 노웨어의 적자도 토끼가 불어나는 속도와 균형을 맞추었을 때였다. 꼬르따사르는 출근길에 토끼 한 마리를 집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데려가려고요?”
“열한 마리는 문제가 다르니까요. 아시다시피 그것은 곧 열두 마리가 되고, 열세 마리가 될 수 있거든요.”
꼬르따사르는 앙드레에게 쓴 편지글에서 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는 듯이. 물론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비논리적인 헛소리로 들리는 말이었다.
토끼는 바 테이블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클로버 잎을 먹고 스탠드 옆에 앉아 졸기도 했다. 꼬르따사르는 책을 읽었고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한 번씩 토끼를 쳐다보았다. 굉장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감탄에 찬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아주 작고 귀여운 토끼예요.”
단발머리가 말했다. 포니테일은 연신 토끼를 쓰다듬었다. 단발머리와 포니테일은 우리 가게의 유일한, 그러나 수입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단골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칵테일을 한 잔씩만 시키고 몇 시간씩 재잘거리다 가고는 했다. 그러나 그날은 칵테일을 세 잔이나 마셨다.
“이 토끼를 사고 싶어요. 얼마죠?”
책을 읽던 꼬르따사르가 고개를 들었고, 파스 붙인 팔을 주무르던 재오가 나를 쳐다보았다. 토끼를 팔 수 있다니! 유레카라도 외치고 싶었다.
“십만 원이요.”
재오가 입을 열었다. 포니테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오가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단골이니까 이십 퍼센트 할인해드리죠.”
“좋아요. 이제 이 토끼는 제 겁니다.”
포니테일이 웃으며 토끼를 품에 안았다.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꼬르따사르의 의자가 넘어졌다. 꼬르따사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포니테일을 덮칠 것처럼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포니테일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토끼를 빼앗았다. 포니테일은 토끼를 안고 있던 두 손을 거두지도 못한 채 황망하게 꼬르따사르를 쳐다보았다.
“아니요. 그러니까, 이 토끼는 절대적으로 제 토끼입니다.”
꼬르따사르가 얕은 숨을 뱉어내면서 말했다.
“꼬르따사르?”
지도교수는 내게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단편집을 준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볼품없이 야윈 몸에 헐렁한 환자복을 걸친 채, 수십 권의 책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책 대여섯 권을 침대 맡에 올려두었다. 지도교수는 링거를 꽂은 잿빛 팔로 책장을 넘기면서 꼬르따사르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더듬더듬 꼬르따사르에 대해 말했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그리스어 교본을 펼쳤다. 그가 이제 와서 그리스어를 공부할 이유는 없었다. 지도교수는 창가에 날아든 새들이 그리스어로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면서, 노랫말을 알려면 그리스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어로 노래하는 새라니, 지난밤에 대체 뭘 읽은 걸까. 그의 얼굴에 꼬르따사르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꼬르따사르는 토끼에 대한 절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말라르메란 말입니다. 이 토끼는 말라르메를 읽을 때 끄집어낸 거예요.”라고 말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인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꼬르따사르를 어떻게든 이해시켜 볼 요량으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바가 망하면 거리에 나앉게 될지도 모른다, 토끼든 거북이든 팔아야 한다, 토끼를 파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제프 쿤스라는 유명한 미술가도 토끼를 판다, 그것도 무거운 스테인리스 스틸 토끼고. 그래서 그는 돈이 많고. 게다가 말라르메를 독점하는 건 지독히 나쁜 일이다, 말라르메가 얼마나 위대한지 또 그가 얼마나 외롭게 살다 갔는지 생각해 봐라…….
나는 지도교수에게 학교를 그만둘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가 학문의 위대함 같은 것을, 해변에서 조개껍데기를 발견하는 일의 순수한 기쁨 같은 것을 웅변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리스어 교본에 머리를 박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병실에서 나오는 길에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시간강사를 만났다. 학문적 업적보다는 대중강연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병실 앞에서 간호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과장된 미소를 보이면서 내게 알은체를 했다. 그러면서 다른 지도교수를 알아보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저 양반이 정교수 임용에 탈락했거든. 잘린 거지.”
학문적인 업적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지도교수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연구에 임했기 때문에 탈락 사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입원한 것만 하더라도 연구실에서 몇 주째 밤을 새우다가 탈진한 것이었다.
“탈진을 했다고 해서 성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 임용 프로그램이 점수를 줄만 한 변변한 연구 성과가 없었다나 봐.”
시간강사는 덧붙여서 이번이 자신에게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해?” 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둘 거라서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병원에서 나와 곧장 가게로 가는 버스를 탔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 지도교수가 나왔다. 그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언어로 말했다. 나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그리스어라는 것을 알았다. 낯선 그리스어 발음에 맞추어 지도교수는 2차원 평면으로 납작해졌고, 그의 존재가 종잇장만큼 얇아졌을 때, 마침내 책장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바에 도착했더니 꼬르따사르가 토끼를 바구니에 담아서 들고 있었다. 토끼를 팔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난밤 내가 했던 말이 먹혀들어서는 아니었다. 꼬르따사르는 토끼가 이빨로 깨문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밤새 토끼가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내는 통에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고 말했다. “말라르메가 더 이상 골방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은 것 같더군요.” 꼬르따사르가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토끼를 팔려고 내놓은지 보름이 지났지만 토끼는 한 마리도 팔리지 않았다. 꼬르따사르는 풀이 죽은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토끼의 목에 로즈마리를 두르기도 하고 티슈로 망토를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재오는 바닥난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로즈마리를 묶던 꼬르따사르의 팔꿈치가 옆구리에 닿기라도 하면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나 역시 꼬르따사르에게 친절할 수 없었다. 적자를 메우려 시작한 번역 아르바이트 때문에 수면시간이 급격히 줄었고, 줄어든 잠만큼 동정심도 줄어든 터였다.
한 번은 꼬르따사르가 술잔을 깨먹는 통에 재오가 크게 화를 냈다. “영국인 가게에서 특수 접착제를 사다 붙이면 될 텐데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영국인들은 물건을 잘 만들거든요.” 꼬르따사르는 앙드레의 아파트에 있는 도자기를 깼을 때처럼 영국인 가게의 접착제 타령을 했다. 재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꼬르따사르를 데리고 나와 담배를 피웠다. “번역 일을 좀 해보겠어요?” 나는 꼬르따사르가 무슨 일이든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꼬르따사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번역거리를 던져주니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 앞에 던져진 문서가 지드나 말라르메가 아니라, 무역회사가 하청업체에 보내는 공문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꼬르따사르는 대체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그가 하지 않은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바를 닫고 돌아와 꼬르따사르가 미루어 둔 번역거리 앞에 앉아 있던 날에는 유독 머리가 지끈거렸다. 창밖으로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엄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날 선 신경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꼬르따사르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그런데 말이죠. 오늘 점심은 엠빠나다를 좀 먹고 싶은데요.”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앙드레의 아파트에서 보았던 가정부쯤으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키보드를 집어던졌다. 키보드가 꼬르따사르를 비껴 벽에 부딪혔고, 자판이 알알이 튕겨져 나왔다. 꼬르따사르가 사색이 되어 나를 쳐다보았다.
꼬르따사르는 토끼 앞에 보기 좋게 클로버 잎을 전시했다. 서툴고 느린 그의 손짓이 필사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꼬르따사르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꼬르따사르는 계속해서 클로버 잎을 매만지면서 “내 토끼니까요. 이 털을 좀 보세요. 참된 존재의 본질이, 아주 정직하게 발현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도 토끼를 거들떠보지 않는 거죠?”라고 말했다. 마음 한편에 피어올랐던 미안한 감정이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콧수염이 난 남자가 보드카를 마시면서, 꼬르따사르를 쳐다보았다. 꼬르따사르는 콧수염과 눈이 마주치자 먼저 입을 열었다.
“십만 원입니다.”
꼬르따사르가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말했다. 콧수염은 술기운이 느껴지는, 인위적인 미소를 짓다가 금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하지만 난 토끼를 살 생각이 없어요.”
꼬르따사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유를 묻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콧수염이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흔해 빠진 하얀 토끼잖아요. 로즈마리를 두른다고 해도, 글쎄요.”
콧수염이 어깨를 으쓱했다. 꼬르따사르가 토끼 바구니 위로 고개를 숙였다. 토끼들은 무심하게 클로버 잎을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재오가 토끼 바구니를 낚아채 창고에 쑤셔 넣었다. 꼬르따사르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재오와 꼬르따사르 사이에서 그 둘을 번갈아보았다. 재오는 창고 문을 쾅 닫았고 꼬르따사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재오는 노란색 양복 한 벌을 들고 와 꼬르따사르에게 건넸다. 꼬르따사르는 양복을 받아들고 가만히 재오를 쳐다보았다. “앙드레가 보낸 건가요?” 꼬르따사르가 물었다. 재오는 꼬르따사르에게 나이트가운을 벗고 양복을 입으라고 말했다. 꼬르따사르가 쭈뼛거리자, 그는 손수 나이트가운을 벗기고 양복을 입혔다. “웬 양복이야?” 내 질문이 재오의 귓가에서 튕겨져 나왔다. 재오는 질문에 답하는 친절을 베풀기에는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어수선하게 꼬르따사르의 양복 매무시를 정돈하고 서둘러 카메라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재오의 팔을 붙잡았다.
“대체 뭐하는 거냐고.”
“내가 광고쟁이라는 걸 잊고 있었지 뭐야.”
재오는 씩 웃더니 스마트폰으로 광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 영상은 노란 양복을 입은 마술사의 얼굴에서 시작되었다. 마술사는 동전을 혓바닥 위에 올렸고 카메라는 그 동전을 클로즈업했다. 마술사가 입을 다물고 목젖을 꿀렁거리고 다시 입을 벌리자 동전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술사는 이어서 트럼프 카드를 입에 넣었고, 장미꽃을 삼켰으며, 비둘기를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마술사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마술사가 불이 붙은 스틱으로 공중에 은행 로고를 그렸다. 은행 로고가 뿌연 연기를 남기며 사라지자, 마술사는 포효하듯 입을 크게 벌렸다. 벌어진 입에서 금화가 쏟아져 나왔다. 폭포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금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또 환호성을 질렀다.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나는 모른다고 말했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말을 덧붙이기 전에 재오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의미심장하지 않아?”
재오는 광고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뭐가 의미심장하다는 것인지, 꼬르따사르에게 유치한 양복을 입히는 이유는 또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재오는 바에서 공연을 하자고 말했다. 칵테일이나 토끼 같은 걸 팔아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다시 카메라를 들어 꼬르따사르를 겨냥했다. 꼬르따사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는데, 그때 재오는 셔터를 눌렀다. 번쩍, 플래시가 터졌다. 꼬르따사르는 총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탁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재오는 바 입구에 포스터를 붙였다. 꼬르따사르가 노란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확대한 것이었다. 사진 속에서 꼬르따사르는 옷가지를 대충 말아 넣은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토끼를 입에 물고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위에는 ‘RABBIT SHOW’라는 활자가 박혔고, 사진 아래에는 아르헨티나 퍼포먼스 그룹 붐의 멤버라는 가상의 프로필이 나붙었다. 이 포스터는 SNS를 타고 사람들에게 공유되었다.
재오는 문에 붙은 포스터를 바라보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꼬르따사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남은 포스터 몇 장을 둘둘 말면서 꼬르따사르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붙였다.
“팝아티스트처럼 보이는군요.”
“그게 뭐죠?”
꼬르따사르가 양복 소매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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