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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플라워
정종량
1. 명호의 죽음
연말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 예년 같으면 각종 송년회 모임으로 정신없을 때이다. 금년엔 예기치 못한 강추위가 너무 일찍 한반도를 덮치는 바람에 즐거운 동창회 모임도 부담이 되었다. 아무튼 황금연휴를 앞두고 현철은 큰 용기를 냈다. 이번 연말연시에는 일본의 오사카 온천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마음이야 늘 품어왔지만 아이 둘을 연년생으로 대학 보낸다는 게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 큰 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이제 겨우 한숨을 돌렸다. 아직 퇴근시간까지는 십 여분이 남아있는데도 직원들은 벌써부터 책상을 정리하고 외투까지 입은 채 서서 웅성거린다. 연말이라 그런지 모두가 들떠있다. 그래도 팀장인 현철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인터넷을 검색했다. 요즘 직원들 사이에선 역시 비트코인이 화제다. 직원들이 자세하게 말은 하지 않지만 아마 투자한 친구들도 꽤 있는 눈치다. 비트코인 뉴스에 한창 빠져들 즈음, 팀 막내인 인영 씨가 전화가 왔다고 한다.
“누구? 국장님? 과장님? 다 늦은 시간에 웬 전화람”하며 궁시렁거리자,
“젊은 학생 같은데요.” 하며 전화를 바꿔준다.
“네, 박현철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박현철 선생님 되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저기 최명호 씨라고 아시죠?”
“네 잘 압니다만, 그 분은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요. 그런데 누구신가요?”
“아 네, 저는 최명호 씨의 장남 최인혁이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웬일이죠?”
“제가 아버님 문제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좀 상의 드릴게 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는지요.” 현철은 일단 승낙을 했다. 그리고 연말이라 연초로 넘길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연말을 넘기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금요일 저녁에 식사를 겸해서 만나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학생에게는 서소문에 있는 고려삼계탕집이 괜찮아 보였다. 사실 서소문에 있는 고려삼계탕집은 명호와 만날 때면 으레 찾던 식당이다. 요즘은 중국, 일본 등에서 온 관광객들로 너무 붐비는 바람에 음식의 질이 예전만 못해졌지만 그래도 학생에게는 그 곳보다 나을 곳이 없을 듯싶었다.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니 명호가 간지도 벌써 3년이 다되어간다. 정말 둘도 없이 막역한 동료였는데 허망하게 가버리다니. 이젠 망각의 세계로 넘어가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호가 죽은 원인을 과로로 인한 뇌진탕으로 알고 있다. 왜냐면 당시에는 패기만만하던 ㄱ시장이 서울 아레나 개발사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임 시장이 굵직굵직한 토목사업을 벌여 크게 재미를 보았던 터라 ㄱ시장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서울아레나개발사업본부 전체가 수년을 쉴 틈없이 일했다. 특히 명호의 상사는 군 출신이었는데 아랫사람을 마치 짐승 부리듯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대부분 직원들이 이 사람 밑으로 전입해 오면 거의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도 명호는 몇 년째 그 사람 밑에서 끈질기게 잘 버텨내고 있었다. 현철이 언젠가 명호에게, “자네 과장 있잖아, 그 사람 인상이 꽤 후덕해 보이던데, 그런데 그렇게 갈궈?”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씩 한번 웃더니 “사람이란 같이 근무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한번 같이 근무해 보시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버텨냈다. 현철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쓰러지기 삼일 전이었다. 그리고 쓰러진지 일주일 만에 그의 부음 소식을 들었으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과로로 쓰러질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현철이 받은 충격은 컸다. 겉보기에는 좀 구부정하고 호리호리해서 연약한 갈대와 같았다. 그러나 휠망정 꺾이지는 않는 갈대였다. 그는 성격적으로도 남과 다투지 못하고,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워 누군가와 대립해본 적도 없었다. 때문에 그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은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현철이 명호를 처음 만난 것은 공덕동의 한 주민센터에서였다. 당시엔 중동 건설 붐이 한창 불 때였다. 현철도 군 제대 후 복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로웠는데, 명호가 신규 발령을 받아 같은 팀에 합류하자 마치 동기라도 만난 듯 기뻤다. 명호는 방위병 근무를 마치자마자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당시에는 공무원시험에 대한 인기가 없어서 응시자가 정원 미달이라 두세 차례 모집해야 겨우 정원이 찼던 시기였다. 한 마디로 운이 좋았던 세대인 셈이다. 처음 마주한 명호의 모습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해맑은 소년이었다. 우선 상고머리인데다가 옷은 약간 빛바랜 점퍼였고, 신발은 뒷굽이 닳을 대로 닳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말을 할 때면 의례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또 말을 명확하게 끝까지 하질 못하고, 입속으로 웅얼거리곤 했다. 여직원들의 입방에 오른 것은 그의 말투보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옷매무새였다. 현철과 명호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그들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연은 다른 데 있었다. 명호의 부인인 김민선 씨를 현철이 소개한 것이다. 그의 부인은 수준급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서울시 교육청 내에서는 참하고 성실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현철이 청소년 주말 프로그램 문제로 자주 그녀와 접촉하면서 알게 된 사이였는데, 처음 명호를 민선 씨에게 소개할 때만해도 사실 여자 쪽에서 조금 머뭇거렸다. 명호가 대범하게 치고 나가거나 여자를 리드하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현철이 나서서 수차례 만남을 주선하고부터 사랑의 불씨가 타올랐고, 결혼에 골인하였다. 결혼 후 명호는 제대로 된 부부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늘 여자에 눌려 살았다.
2. 인혁과의 만남
명호의 아들을 데리고 삼계탕 집을 찾으니 의외로 한가했다. 이층 창가에 자리 잡고 앉으니, 정동교회 및 러시아대사관으로 향하는 도로는 벌써부터 대형 관광버스들로 줄지어 서있었다. 중앙일보사와 의주로로 넘어가는 서소문 대로변도 퇴근 차량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모습들이 오히려 현철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줬다. 앉자마자 현철이 먼저 익숙한 솜씨로 냅킨을 뽑아 테이블 위에 놓은 다음 수저와 젓가락을 그 위에 얹었다. 종업원이 물 컵을 가져오자 이번에는 인혁 학생이 물병을 들고 따른다. 현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머님은 안녕하신가?
“네, 잘 계십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2학년인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인혁이 덧붙인다.
“동생 있는 거야 나도 알지. 근데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인가? 세월이 정말 빠르긴 빠르군. 그래, 학생 전공은 무엇인가? 참 방학은 진작 했겠지?”
“네, 관광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방학 중이라 바로 옆 플라자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요.”
“아 그런가. 그럼 우리 시청 바로 앞이네. 그런데 나를 만나자는 건 무슨 일인가?” 현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인혁은 들고 온 가방을 열고 두툼한 검정색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아버지 유품입니다. 곧 3주기를 맞이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유품들을 아예 정리하려고요. 노트가 유독 많았는데요, 대부분 사무실에서 쓰셨던 노트들이라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검정 노트 한 권만은 뒷부분에 이상한 메모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가지고 왔습니다. 또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아버님과는 가장 친하시고, 생전에도 자주 만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치자, 인혁은 노트 뒤쪽의 접혀진 부분을 펴서 현철에게 건넨다. 노트를 보니 상당히 오래된 시청의 업무용 수첩이었다. 앞 쪽에서부터 대충 훑어보니 업무 관련 메모들이 정서되어있거나 갈겨쓴 부분들이 많았다. 아마 부서 내에서 업무회의 도중 받아썼거나, 출장 중에 급히 메모를 한 것 같았다. 뒤쪽의 접혀진 부분을 열자, 짤막짤막한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문장들이 일관성 있게 쓰인 것도 아니고, 한 줄, 또는 반 줄 정도의 단상들을 메모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나도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난 왜 그녀로부터 벗어나질 못하는가?”
“난 아직 그녀의 손을 놓을 수 없다. 아직 보내질 못하겠다.”
“은혜, 너무도 허망하다. 그리 쉬 가버리다니…….”
“오늘이 너의 기일, 현철과 소주 한 잔 했다. 현철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눈치다.”
“해바라기로 민선과 심하게 다퉜다. 죄 없는 아내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렇지만 해바라기를 뽑아버릴 순 없다. 내가 그녀를 완전히 보내기 전까지는…….”
“태양의 꽃, 황금꽃”
“해바라기 노란 꽃잎 하나하나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은혜에 대한 추억들을 하나씩 새겨 본다.
“벌써 가운데 해바라기 씨앗은 징그러울 정도로 까맣다. 반면 가에 노란 이파리들은 시들고 탈색해서 추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까만 씨앗 덩어리, 까맣게 타버린 내 심장…….”
“은혜, 은혜, 은혜, 성은혜, 이젠 지워야 할 이름........”
“버티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아침 밥상에서 민선과 큰 아이가 단풍구경 얘기를 꺼내는데 나에겐 별나라 얘기처럼 들렸다. 나의 무반응, 부부싸움의 단초가 되었다. 모두가 내 잘못이다.”
문장은 계속 이어졌지만 긴 문장은 없었다. 뒤쪽에서 삼 쪽에 걸쳐 쓰여 있는 메모에는 분명히 은혜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녀의 죽음에 대한 회한 등을 담고 있었다. 만약 명호의 부인이 본다면 좀 부적절한 내용들이긴 했다. 다만 아들 인혁이 먼저 눈치를 채고 아빠 친구인 현철에게 가지고 달려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명호의 큰 아들은 이제 대학생이므로 어느 정도 자기 아빠를 이해해 줄만도 했다. 그래서 현철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마침 식사가 나왔다.
“자 식사부터 할까. 식사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식사 끝나면 요 밑에 분위기 좋은 커피점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또 얘기하자고.” 현철이 말했다.
어느 새 식당에 사람들이 꽉 차서 조금은 시끄러웠다. 고려 삼계탕의 명성도 이젠 옛말이 되었다. 중국, 일본의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질이 많이 떨어졌다. 국물 맛도 덤덤해졌고. 식사를 하는 동안 시끄러워 말을 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현철은 인혁에게 식사를 빨리 끝내고 나가자고 말했다. 평소 현철 같으면 이곳의 인삼주를 한 병 별도로 주문해서 보다 느긋하게 즐겼을 터인데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처음 보는 학생을 앞에 두고 혼자 술을 마신다는 게 좀 그랬다. 둘은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서소문 대한항공 본사 건물 1층에 있는 탐앤탐스 커피 점으로 갔다. 벌써부터 가운데 테이블은 여자들이 차지하고 앉아 수다 삼매경이다. 건너편 자리에선 연인인지 직장 동료인지 모를 커플이 커피를 두 손으로 꼭 감싼 채 머리를 맞대고 앉아 소곤거린다. 다행히 창가에 자리가 났다. 인혁에게 빨리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이르고는 주문부터 했다. 인혁은 카푸치노, 현철도 잠시 머뭇거리다 같은 것으로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알림판이 심하게 요동치며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인혁이 재빨리 들고 일어나 카운터로 향한다. 창 밖에선 사람과 차량들로 분주히 왕래하는 모습이 훤히 보여 가슴이 툭 트였다. 전에는 하늘이 회색빛 구름이면 십중팔구 흰 눈이라 가슴이 설레곤 했는데, 요즘은 이게 스모그인지 정말 눈이 오려는 징조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오늘도 잔뜩 찌푸린 잿빛하늘 모습만으론 영 판단이 안 섰다. 인혁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혹시 시럽 드시냐고 묻는다. 현철은 괜찮다고 말했다. 카푸치노의 뚜껑부터 열었다. 뜨거운 걸 스트로로 마시면 입천장을 데기 십상이다. 함께 한 모금을 들이킨 후 인혁이 띄엄띄엄 말을 잇는다.
“제가 궁금한 것은 그 은혜라는 분입니다. 어떤 분이시고, 저희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인지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이젠 성인입니다. 물론 불필요한 부분은 제가 홀로 삭이고 어머니에게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닐세, 그렇게 거창한 비밀 얘기는 없네.” 현철이 말을 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남녀 간이라는 관계가 없을 순 없으나 그리 심각한 수준은 결코 아니라고 했다. 그저 젊은 시절 직장 동료 간의 평범한 이야기일 뿐임을 덧붙였다.
3. 은혜의 등장
명호가 주민센터에 입사해서 일에 좀 익숙해질 무렵 은혜가 나타났다. 당시엔 정식 직원이 아닌 통계분석 계약직이었는데 일종의 임시직이었다. 그런데 등장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진한 얼굴 화장에 분수 넘치는 화려한 의상이며 명품 구두, 진짜인지 모조품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액세서리 등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그녀는 곧장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주민들의 화젯거리가 됨은 물론 호사가들의 입방에 곧 잘 오르내리곤 했다. 선녀님께서 어떻게 이처럼 누추한 곳까지 내려오셨을까? 조금 지내고 보니 잦은 출장과 수 없이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들로 인해 주변 동료들에게 많은 불편을 안겼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은혜가 일반기업체 CEO들의 신상 정보는 물론 가족들에 대한 정보까지도 지니고 다니면서 가끔 이것을 자랑하곤 했다. 오후가 되면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고 조용조용 뭐라고 얘기한 후 밖으로 나갔다. 윗사람이나 옆 동료에게 사전 보고나 협조 부탁도 없이 그냥 나갔다. 그리곤 사무실로 돌아오지도 않은 채, 곧장 집으로 퇴근해 버렸다. 그래도 좋은 게 좋다는 풍조 때문에 그녀의 튀는 행동은 대충 묻혀서 넘어갔다.
언젠가 직장 내 추계 체육대회를 위해 전 직원들이 북한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 우이동에서 시작해 대남문을 오른 후 진관내로 빠지는 코스였다. 초반엔 서로 어울려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 구경을 하느라 정신줄을 놓더니, 가파른 오르막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다람쥐의 재롱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현철과 명호는 뒤처지는 동료들을 이끄느라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연신 훔쳐댔다. 대남문 위에 오르니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웠다. 시간이 촉박했다. 남자들에겐 평이한 코스였지만 아무래도 여자들에겐 좀 무리였다. 어느덧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드디어 식사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모두가 식사부터 찾았다. 소맥을 곁들인 점심에 모두가 나가떨어졌다. 노래방 갈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귀가를 서둘렀다. 현철은 귀가 도중 은혜의 집이 효창공원 앞 숙대 부근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철도 신공덕동 백범로 중간에 위치한 산꼭대기 부근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터였다. 우선 서로가 반가웠다. 둘이 6개월여나 가까이 살면서 서로를 몰랐다는 게 조금은 계면쩍기도 했다. 또 새삼스레 서로를 알게되어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은혜와 현철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은혜가 자주 현철의 자취방에 놀러와 머물곤 했는데 그 때 비로소 은혜의 가족사를 알게 되었다.
은혜는 천안에서 일남 이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땐 아버지의 사업이 꽤 잘 되어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녀가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갈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회사 문을 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삶의 명암이 현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아버지는 화병에 시달리다 결국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작은 문구점을 운영하셨는데 영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어머님이 홀로 두 자매와 남동생을 건사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벅찼다. 은혜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형편상 차마 대학 가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 친구 분의 도움으로 그녀는 서울에 있는 어느 중소기업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괜찮은 외모 덕분에 기업 홍보실과 비서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녀 인생의 시작 단추를 잘 못 채우는 단초가 되리라고는 그녀도 상상을 못했다. 은혜는 각 종 사내 모임과 간부들의 사적인 모임에 수시로 불려 다니면서 유흥행사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되레 허파에 바람만 잔뜩 불어넣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물론 그로인해 적지 않은 돈을 만진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에 빠져들던 은혜가 이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땐 발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삼촌의 도움으로 구청 계약직으로 들어왔는데 첫 발령지가 현철의 주민센터가 된 셈이었다.
이후 은혜가 현철의 자취방을 들락거리면서 둘 사이는 한층 가까워졌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집 딸이었다. 당시 안집엔 이남삼녀를 두고 있었는데, 그 집 아저씨나 아주머니께서는 디자인을 한답시고 일에만 몰두하다가 혼기를 놓친 과년한 둘째 딸을 현철과 맺어주려고 열심히 고심 중이었다. 주말 저녁이면 안집 식구들과 자주 식사를 했다. 둘째 딸도 처음엔 평생 박봉에 시달려야 하는 현철의 직업에 시큰둥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현철의 모습에서 미래를 읽었는지 상당히 호감을 보이는 눈치였다. 분위기가 이러한데 은혜가 찾아와 밤늦게 있었으니 안집 식구들이 밖에서 야단법석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빈 물통을 두들기거나, 아무 죄 없는 개를 발로 차서 짖게 하기도 하고, 때 늦은 청소를 한답시고 소란을 피워대기도 했다. 결국 은혜가 눈치를 채고 발걸음을 끊었다.
4. 현철의 결혼
“그럼 그 때 자취하신 그 집의 둘째 따님이 지금의 사모님이 되신 건가요?” 인혁이 물었다.”
“허허허,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인생에 무슨 문젯거리가 생기겠나? 난 그 집의 막내딸과 결혼했지.”
“네? 왜요?” 인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현철의 사연은 길지만 요약하면 이러했다.
현철이 살던 백범로 언덕배기 경사면에는 봄이면 목련이며, 철쭉, 벚꽃, 개나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장관을 이루는 곳이었다. 덕분에 봄가을이면 많은 사람들이 현철의 집 앞에서 꽃구경을 하느라 소란을 떨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봄 날, 시끄러운 바깥세상과는 달리 현철은 엊그제 들여놓은 한국문학전집에서 한 권을 꺼내들고 한창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사실 현철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그처럼 고급스럽고 비싼 문학전집을 살 형편은 못 되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쯤 고향의 형님 친구가 어떻게 알았는지 현철의 사무소로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자기가 파는 문학전집을 한 질만 사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단다. 부탁이라기보다는 반 강제로 떠안기다시피 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중 한 권을 빼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마침 현철의 방 창문 밑에서는 새끼 밴 안집 개가 무거운 배를 땅바닥에 깐 채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졸음을 청하고 있었다. 에이포 용지 두 쪽 크기의 작은 창으로 사정없이 내리꽂는 따가운 햇볕에 현철의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때 봄기운을 만끽하러 밖에 나갔던 막내 아가씨가 들어오다 현철이 궁금했다. 그녀는 문간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려다 뒤돌아서서 현철의 문을 노크했다. 기척이 없자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현철이 책상에서 열심히 졸고 있었다. 그런데 방안의 천장과 벽, 모서리 곳곳에 검은 곰팡이들이 볼썽사납게 피어 있었다. 막내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오빠, 졸지만 말고 날씨도 좋은데 도배나 좀 하고 사시지! 저 검은 곰팡이 안보이슈?” 현철이 책을 덮고 천장과 벽을 둘러보니 정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즉각 실행에 옮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고 생각 난 김에 뿌리를 뽑아야지. 그는 나중으로 미루면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덕동 굴다리에 있는 지물포로 가서 도배지며 풀을 사왔다. 막내도 좀 한가했는지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막내 아가씨가 바닥에 상을 펼쳐놓고 도배지에 풀칠을 해서 올려주면 현철은 의자 위에서 천장과 벽에 한장 한장 붙여나갔다. 그러기를 한참 하다가 현철이 도배지를 받으려고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아뿔싸!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목련꽃보다도 새하얀 목덜미며, 백범로 언덕마루 보다도 더욱 부풀어 오른 그녀의 젖가슴이며, 옷매무새 사이로 드러난 깊게 파인 가슴골에 현철은 그만 현기증이 나고만 것이다. 막내도 현철의 갑작스런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막내의 뒷덜미에 돋아난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명지털이 현철의 마음을 더욱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마치 민들레 꽃씨를 감싸고 있는 하얀 솜털 같았다. 현철이 이성을 잃었는지 아니면 숨겨진 야성이 폭발했는지 둘은 결국 방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한참 후 정신이 들 즈음, 갑작스레 현철의 등으로 뭔가 축축한 게 절퍼덕 하고 떨어졌다. 바로 천장에 붙인 도배지가 설 붙인 탓에 그대로 현철을 덮친 것이다. “엉? 하늘도 시샘하나?” 둘은 동시에 폭소를 터트렸다. 그렀다. 역사는 밤에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길로 막내 아가씨가 아이를 갖는 바람에 현철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안집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둘째 아가씨와 한동안 서먹서먹한 관계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막내 아가씨와의 결혼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었다.
5. 명호와 은혜
은혜도 막내 아가씨에 대한 현철의 진심어린 사랑을 어느 정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현철을 쉬이 포기한 게 아닐까? 결국 현철의 결혼은 은혜와 명호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바쁜 은혜에게 명호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명호는 은혜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은혜도 명호를 사랑했는지는 모른다. 왜냐면 은혜의 행동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희 아버지와 그 은혜라는 분은 왜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그 얘기도 다 하려면 길지. 내 얘기 안 들었나? 남녀 간에 사귄다고 다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은혜 아줌마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희 아버지 수첩에는 그분 이름이 계속 나오고 있던데요.” 인혁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면 그 성은혜라는 분에 대해서 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저희 아버지와 어떤 관계이셨는지요.”
현철이 하숙집 딸과 깊은 관계가 되면서 은혜와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면서 은혜의 낭비벽이 슬금슬금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은혜는 쉽게 돈 버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서 토요일, 일요일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월요일 출근할 때면 영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곤 했다. 화사하고 고급스런 옷차림이며 진한 화장, 영화배우 뺨치는 헤어스타일이 늘 다른 여직원들의 기를 죽이고 총각 직원들의 가슴을 휘저어 놓곤 했다. 그 비법이 뭔지 명호나 현철은 전혀 몰랐다. 그러다보니 은혜는 업무에 소홀해지고 팀장이나 센터 장으로부터 자주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명호는 은혜의 구세주였다. 은혜의 밀린 업무나 급한 일들을 대신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명호씨 본인의 업무를 제쳐두고 은혜 아줌마 일을 먼저 해주기도 했다. 처음에 명호에게 관심이 없던 은혜도 거의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명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물론 생리적으로 보면 둘의 궁합이 맞을 순 없었다. 그런데도 둘은 늘 붙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계기는 아무래도 한강변 자전거 하이킹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금 이른 봄 오후였다. 날씨가 상당히 포근했다. 둘은 처음엔 여의도 주변을 돌며, 근린공원에 만개한 벚꽃, 철쭉, 개나리, 산수유의 향취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그들은 내친김에 별 장비도 없이 한강변으로 나섰다. 우선 서울대교 밑으로 내려가 확 트인 한강변을 내달리다보니 욕심이 생겼다. 멀리 성산대교를 지나 행주대교에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그만 은혜씨의 자전거가 펑크가 나고 말았다. 그러자 은혜 씨가 명호의 자전거를 타고 명호는 은혜의 자전거를 끌며 여의도까지 와서 수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의 고생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파김치가 된 두 사람은 결국 택시를 불러 타고 은혜의 집으로 갔는데 해는 저물어 저녁 식사시간을 훌쩍 넘겼단다. 명호가 밖에 나가 술과 먹을거리를 사다가 저녁 겸해서 때웠는데, 결국 둘은 너무 취해서 정신을 잃고 쓸어졌단다. 물론 다음 날이 월요일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결근했다. 현철이 나중에 물으니 명호는 아침에서야 겨우 술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그 후 아무 일 없었느냐고 묻자, 명호는 별일 없었다고 대답했다. 현철이 정말 별일 없었느냐고 재차 다그치자 정말 깨끗하다고 명호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현철은 명호를 믿었다. 그러나 현철의 농담 섞인 질문에 명호가 과도하게 역정을 내는 걸 보고 현철은 조금은 의아해했다. 그 후 두 사람은 현철 몰래 자주 만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혜가 갑자기 사표를 내던졌다. 천안에 있는 엄마가 문구점을 접고 작은 서점을 차렸는데 함께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은혜가 내려간 뒤로 명호는 구청으로 발령받아 갔고, 현철은 시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은혜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모두가 헤어졌다면 저희 아빠와 엄마는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아까 말씀하시기로는 아저씨께서 저희 부모님 중매를 서셨다면서요.”
“맞아, 내가 주선했지.”
은혜가 떠난 뒤 명호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음을 추스르는 듯 했다. 물론 처음엔 여자를 소개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마도 은혜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후 현철이 업무적으로 잘 알고 지내던 교육청의 김민선 씨를 명호에게 소개했다. 물론 처음엔 좀 서먹서먹했지만 민선 씨가 명호를 그럭저럭 리드해나갔다. 결국 6개월 만에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6. 은혜의 귀환
은혜가 떠난 뒤로 현철과 명호는 정말 은혜를 잊다시피 했다. 실제로 현철이나 명호도 결혼했기 때문에 그녀를 마음에 담아둘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명호는 현철과 자주 만나 술 한 잔 하면서 은혜와의 옛 추억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십여 년도 더 흐른 언젠가 갑자기 은혜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서울 효창동 옛집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보고 싶다는 거였다. 둘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산도 변할 만큼의 세월이 흘렀는데 은혜는 시간을 거슬러 그들 앞에 다시 돌아온 선 것이다. 셋은 효창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플라타나스 이파리들이 의자 위에 나뒹글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셋은 자리를 잡고 맥주를 따랐다. 은혜의 자초지종 얘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로부터 들은 얘기들은 경천동지할만 했다. 천안으로 내려가서 엄마와 무슨 가계를 운영한다고 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실은 서울의 모 음향기기 수출업체 사장의 부친 칠순잔치에 연예 도우미로 놀러 갔다가 홀로 사는 부친의 끈질긴 재취 요청을 받았단다. 특히 자식들의 달콤한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 매달 일정액을 지원해주고, 천안의 어머님 생계는 물론 동생들 취업문제도 해결해 주겠다는 게 조건이었다. 은혜의 허영심을 채워줄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얼마를 살다가 노인네가 죽었다. 그러자 자식들은 은혜에게 얼마간의 보상금을 쥐어준 후 매몰차게 내 쫒았다. 사실 정식 결혼이 아닌 사실혼 관계였기 때문에 부인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근거도 없었던 셈이다. 은혜는 그래도 자기를 기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철과 명호뿐이라고 생각했다.
날씨가 쌀쌀했던지 은혜가 진저리를 쳤다. 모두가 어느 정도 취한 듯 했다. 그래서 다시 은혜의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현철이 보니 은혜는 도대체 뭘 해먹는지 집안에 아무 것도 없었다. 걱정이 된 현철이 졸고 있는 둘을 놔둔 채 밖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편의점엘 들려 이것저것 챙겨 한보따리를 사들고 다시 들어오니 명호와 은혜는 이미 고꾸라져 있었다. 현철은 둘을 가까스로 침대로 옮기고, 옷장에서 이불을 꺼내 둘을 덮어주었다. 그길로 현철은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현철이 명호에게 전화를 걸어 은혜가 그렇게 좋으면 세컨드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좀 진한 농담을 했다. 물론 명호가 길길이 날뛴 건 두말한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현철도 실은 그들 둘에 관해서 걱정을 안 한건 아니었다. 설마설마 하면서도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현철이 걱정한 것은 은혜의 생계문제였다. 성격상 자질구레한 아르바이트에 만족할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중에 돈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다 떨어지면 또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지 걱정이 되었다.
명호로부터 은혜의 비보를 전해들은 것은 다시 만난 지 불과 두어 달 후였다. 은혜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현철은 머리가 핑 돌았다. 담당의사 말로는 은혜가 상당히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다고 했다. 집안에도 각종 약병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은혜의 마지막도 결국엔 우울증에 의한 음독자살로 끝나고 말았다.
“음, 여기까질세,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저희 아버지와 그 은혜 아줌마라는 분과는 별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인혁이 강한 의문표를 내던졌다.
“그러네,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여기까지네. 자네 아버지 성품을 내가 잘 알지 않는가. 그 이상은 없다네.” 현철이 내친 김에 더욱 깊게 말뚝을 박았다.
“자네 아버지야 정말 착하고 신실한 분이라 은혜 아줌마와는 직장 동료로서 내왕했고, 나중엔 가엾은 옛 동료를 돕는다는 심정에서 많이 도와줬지.” 현철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자네 아버지가 진심으로 은혜 아줌마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야. 또 은혜 아줌마가 죽기 전까지도 그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렇지만 그 이상의 무슨 영화 같은 러브 스토리는 없었네. 나나 자네 아버지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있는 몸인데 더 이상은 없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런데 사실 현철의 머릿속에는 아직 더 많은 얘기들이 뭉쳐놓은 솜사탕처럼 기억 속에서 끈적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더 이상은 이제 겨우 대학 일학년인 명호의 아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될지도 몰랐다. 현철은 아직 뭔가 부족한 듯한 표정이 역력한 인혁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며 인혁에게 물었다.
“그래 어머님은 잘 지내시지? 직장은 잘 다니시고?”
“네, 여전히 바쁘세요. 얼마 전 집 가까운 고등학교의 서무과장으로 오셨거든요. 저희도 공부하느라 정신없고요. 저는 공무원은 하지 않으려고요. 아버지가 너무 힘들게 일하시는 걸 내내 보며 자랐거든요.” 현철은 인혁의 어깨를 감싸며 토닥거렸다.
“그래, 자네 하고 싶은 걸 하게. 조금 늦거나 힘들더라도 말이야.”
“일하는 즐거움이 중요해. 퇴직 후의 작은 인센티브 미끼에 끌려간다면 인생이 얼마나 불행해지겠나?”
“그런데 자네 좋아하는 여자친구는 있나?”
“아직요.” 현철을 바라다보며 씨익 웃는 옆모습이 명호보다는 민선의 느낌이 더욱 강하게 와 닿았다. 명호가 아닌 것에 현철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해바라기는 어떻게 했나? 지금도 가꾸고 있는가?” 현철이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아버지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심지 않으셨어요. 근데 어머니께서는 해바라기 말린 것을 거실에 거꾸로 매달아두고 계세요. 생전에는 그렇게 못마땅해 하셨던 분이”
“허허, 그래? 어머니께서 생전에 구박했던 게 마음 아프셨던 게지.”
7. 그 후 이야기
명호의 아들을 보내고 현철은 시청 그리고 무교동을 지나 청계천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거리의 음식점이며 가계들도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했다.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족들 모습 속에선 경제난이니 청년실업이니 하는 주눅 드는 무거운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청계천에 이르니 다리 난간을 따라 이국적인 무늬로 장식된 무리나리에의 형형색색 반짝이는 모습에 멍하니 정신 줄을 놓았다. 다리 난간 주변에는 액세서리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비켜갈 공간이 없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우두커니 서서 감상에 젖어들었다.
“아, 이런 곳도 있었구나. 아파트 융자금 꺼나가느라 어깨는 짓눌리고, 상사의 업무 독촉에 가슴 졸이며 살아왔는데…….”
멀리 청계천 입구에 장승처럼 서있는 소라고둥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빈껍데기, 세월이 흐르면 겉모습만 번지르르 하고 속은 텅 빈 소라고둥이 될 텐데. 그대로 거대한 조각품에 시선을 멈추니 명호의 모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현철의 기억 속에서 그가 다시 부상하고 있었다. 명호가 쓰러지기 3일전에 만났을 때, 그가 현철에게 한 얘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언젠가 명호와 은혜가 한강변 하이킹을 갔다고 했다. 그리고 자전거 펑크로 엄청 고생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뒷얘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은혜의 집으로 와서 함께 밤을 지새웠는데 바로 그 때, 그들은 한 몸이 되었다. 은혜가 명호를 받아들인 것이다. 명호는 처음 부정을 하다가 계속 다그치는 명호의 질문에 나중에 눈을 내리깔고 흐지부지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때는 은혜도 명호의 진심을 어느 정도 알고 그녀의 몸과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물론 은혜의 사치나 낭비벽을 명호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는 나중 문제였다. 아직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은혜가 천안으로 내려간다고 했을 땐 이미 임신 사실을 알았지만 명호에게는 함구했다고 한다. 아기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자기도 한번 낳아보겠다는 치기어린 심정이 아니었을까? 천안으로 내려간지 몇 달 후 은혜는 사내 아이를 순산했는데 지금은 엄마가 돌보고 있다고 한다. 아마 지금쯤은 인혁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 후 생활비 때문에, 아니 사치, 낭비벽이 도져 70대 부자 노인의 재취로 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장의 부친인 그 노인네가 죽고, 그 가족들로부터 내침을 받았는데, 그길로 서울로 돌아와 명호를 만났던 것이다. 서울로 온 뒤로 은혜와 명호는 자주 다투었다. 아이문제 뿐만이 아니라 생활비가 주된 문제였다. 은혜의 우울증이 심각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은혜가 자주 병원에 다니고 입원도 했지만 비용을 두 사람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은혜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던 날 밤, 그녀는 명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 문제로 더 이상 발목을 잡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얘기했다고 한다. 명호는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 다음날 아침 일찍 효창동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은혜는 전날 밤에 음독한 뒤였다. 숨이 가까스로 붙어있어 즉시 119를 불러 병원으로 내달아 보았지만 끝내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한 명호의 심리적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그래도 그는 은혜가 간 뒤에도 2년이나 끈질기게 버텨냈다. 그가 쓰러지기 열흘 전, 명호가 현철에게 갑자기 전화를 해왔는데,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사달라고 했다. 현철이 흔쾌히 응낙하고 만났다. 그 때 술이 좀 취하자 명호의 억눌렸던 감정이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술집 안에 다른 손님들도 많았는데 명호는 그만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남의 눈치만 보며 순둥이처럼 살아왔던 그의 과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딴 사람처럼 보였다. 현철에겐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현철도 처음엔 당황해서 달래보려 했지만 부질없음을 알고 그냥 놔두었단다. 주변의 사람들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무시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다른데 있었다. 은혜 어머니께서 며칠 전 전화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제 다 큰 아이를 어떻게 할지. 그렇다고 명호에게 뚜렷한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계속 울먹였다.
“은혜야 너무 미안하다. 내가 널 죽음으로 몰아넣었구나.”
“에이, 이 사람, 그게 무슨 소린가. 방도를 찾아봐야지, 그리고 그게 왜 자네만의 잘못인가?” 현철도 더 이상 명호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그의 어깨를 다독여 줄 수밖에. 그는 죽은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은혜를 깊은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본 적도 없는 아이의 검은 그림자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휘감아오고 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모습에서 삶의 희망이라곤 조금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쓰러졌다. 현철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다리조차 무거워졌다. 이젠 나도 머릿속에서 그리고 가슴 속에서 그들 두 사람을 지워야 할 텐데. 현철은 종로3가를 향해 어렵사리 발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좀 후련해질 때까지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정초에 추위가 좀 가시면 소주라도 한 병 사들고 명호의 납골당을 찾아가볼 작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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