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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외기러기
정종량
민수는 업무가 끝나자마자 경식의 병실을 찾았다. 그는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기 때문이다. 흡사 야전병원을 방불케 하는 외과병실은 6인용으로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왔다. 칸막이가 처진 침대마다 보호자가 있기도 하고 어떤 곳은 환자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느라 힘들어했다. 커튼 밖으로 드러난 환자들을 보니, 팔과 다리에 석고를 하고 있거나,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환자는 머리를 아예 붕대로 칭칭 감아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경식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자, 맨 안쪽 침대 옆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혹시 박민수 씨 아니냐고 묻는다. 민수는 그녀가 누군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경식이가 여러번 말한 혜민 씨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경식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있는데 몇 달은 갈 거라고 했다. 통증이 있는지 좀 찡그리기는 해도 말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혜민 씨 앉을 의자가 없어 통로를 서성거리는 게 눈에 거슬렸다. 괜히 위문차 왔다가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그는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좀 걷기로 했다. 벌써 서산 너머로 해가 기울었는지 땅거미가 지고 어스름이 짙게 깔렸다. 봉원사 쪽을 향해 걷다 보니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버스 정류장이 저만치 보였다. 대기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는 여유롭게 앉아 눈을 감았다. 버스가 몇 대 지나치는 듯했다. 머릿속은 언젠가 광명사거리역 부근에서 경식이와 만났던 그 막걸리 집으로 필름은 빠르게 되감아 가고 있었다.
“야 민수야, 우리 딱 한 잔만 더 할까?”
“야 인마, 무슨 소리야, 2차까지 다 하고, 커피까지 마셨잖아.”
“쉿, 다른 애들 알면 또 달라붙는다. 상민이 준배란 놈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난데없는 제안이었다. 평소 같으면 2차도 싫다고 할 녀석이 오늘은 웬일로 3차를 가자고 하니 민수로서는 눈을 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동창회라고 해봤자 몇 명 안 된다. 사실 동창회라기보다는 반창회다. 때문에 몇몇이서 따로 만날 일도 없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못다 한 얘기들을 하고 싶어서.”
“아닌데. 좋아, 아직 초저녁이니까 가보자고.”
사실 경식은 기러기 아빠다. 오래되었다. 아마 십여 년 쯤 되었을 게다. 부인이 애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건너가서 공부시킨다고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쥐꼬리만 한 공무원 월급으로 생활비에 학비까지 감당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비싼 항공료 때문에 서로 왕래하기조차 힘들어 마누라 얼굴 본 지가 까마득하다고 했다. 문제는 멀쩡한 사내놈이 숱한 세월을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로서 적적함만은 어떻게 도와줄 재간이 없다. 그래도 지금까지 별 스캔들 없이 홀로 지내왔다는 게 신통한 일이다.
동창 녀석들이 하나 둘 인사를 하고 광명사거리역에서 헤어졌다. 둘만 남았다. 경식이 근처 광명 전통시장 안에 시원한 막걸릿집이 있다며 민수를 이끌었다. 사람이 북적거릴 텐데 괜찮겠느냐며 민수가 묻자, 조용한 곳이란다. 둘이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조명이 휘황찬란했다. 사람들이 좁은 통로를 서로 비켜가느라 불편하기 짝이 없다. 좌우로 진열된 생선, 야채, 떡이며, 전통 한과들이 즐비하고 민수가 좋아하는 돼지족발이 곳곳에 푸짐하게 쌓여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머뭇거리자, 경식이 뒤를 바라보며 빨리 따라 오라고 독촉한다. 좌우로 몇 번 꺾어들더니 마침내 찾아든 곳이 초라한 돼지족발집이다. 아니, 그 크고 맛있는 집들을 모두 놔두고 왜 이렇게 초라한 곳으로 온 거야? 그래도 이집 맛이 괜찮아. 먹어봐.
“할 얘기가 뭐야?”
“성급하기는, 너 취미로 글 쓴다니까 해주고 얘기가 있어서 그래.”
“한두 번 만난 것도 아닌데 무슨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는 거야?”
주모가 밑반찬을 들고 왔다. 난데없는 게장에 도토리묵, 김치전까지 좀 특이하다. 곧바로 나온 막걸리가 얼마나 시원한지 속이 다 얼얼하다. 주전자를 열고 들여다보니 얼음이 둥둥 떠 있다. 실내에 다른 손님들이라곤 뒤쪽 선풍기 바로 밑에 앉아있는 어르신 한 팀뿐이다. 그들도 마무리가 다 되어 가는지 주섬주섬 챙기는 모습이다.
“무슨 얘긴데, 해 봐.” 이번엔 민수가 다그쳤다.
내가 신창동 주민센터에서 동장으로 근무했었잖니. 그때 이야기야. 그러니까 벌써 20여 년이 훌쩍 흘렀네. 하루는 아침부터 아래층 민원실이 시끌벅적하더라고. 웬 여자가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 사무장이 여자를 불러서 얘기를 잘했다고 그러더라고. 아마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서 도와달라고 그랬나 봐. 문제는 그 여자가 그 후로도 계속 찾아와서 소란을 피워대는 거였지. 난 사무장과 담당자를 불러서 가능하면 동네 주민이니까 도와주라고 했어. 그런데 직원들 말이 도와주려도 도와줄 방도가 없다는 거야. 주민등록이 되어있지 않다는 거였지. 알다시피 방법이 없잖아. 그 여자를 직접 불러 설명해줬지. 주민등록이 없으면 우리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다. 여자가 이해를 하는 것 같더라고. 일단 주민등록을 먼저 만들라고 했지. 그런데 호적이 아예 없다는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호적은 보증 서류도 필요하고, 법원 재판까지 받아야 하잖아. 난 일단 사연을 들어보기로 했어. 그 여자가 호적, 주민등록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지.
제 이야기를 하려면 몇 십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만경강이 굽이치는 삼례 하리라는 곳이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집 맏이었던 엄마는 그 일대 천석꾼으로 통하던 어느 부잣집에 후처로 들어갔습니다. 그 때야 남자들이 바람피우고 애 낳으면 두 집 살림하는 거 다반사였지요. 문제는 나를 낳은 뒤 호적에 안 올린 겁니다. 본처가 눈을 부릅뜨고 결사반대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도 얼마 안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자, 전 어디 거처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쪽 엄마나 배다른 형제들은 절 눈엣가시처럼 여겨왔으니까요. 전 무슨 배짱이었는지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 내린 곳이 지금 생각해보니 용산역이었나 봅니다. 용산역 부근을 며칠 동안 헤매다가 부근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해도 짧은데다가 찬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후려칠 때였으니까, 아마 11월 중순쯤이었나 봐요. 세수도 못하고 꾀죄죄한 몰골로 작은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계단에 앉아 있었지요. 정말 처량하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제 앞으로 다가오더니,
“추운데 왜 이렇게 앉아 있느냐?”
사정을 했죠. 어디 식모살이라도 좋으니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러자 남자가 그럼 자기 집으로 가자고 그러더군요. 바로 후암동 부근이었습니다. 들어간 집이 얼마나 크던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그처럼 대궐 같은 집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전 그 집에서 월급을 받고 집안일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주인 남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아침에 나가면 늦게 들어오거나 거르는 날도 많았습니다. 퍽 궁금했지요. 도대체 뭐하는 남자일까. 왜 혼자 살까. 가족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런데 거실에는 분명 가족사진이 걸려있었거든요. 어느 일요일 남자가 쉬는 날이었습니다. 전 커피를 들고 남자 옆으로 다가갔지요. 마침 남자는 민속 씨름경기를 보느라 정신이 없더라고요. 경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그때서야 나의 존재를 알았나 봐요. 나 보고 커피를 한 잔 더 타오라고 하더니, 같이 마시자고 합디다. 우린 처음으로 그렇게 마주 앉았습니다. 아저씨가 날 한참 쳐다보더니 처음으로 한 마디 하더군요.
“아주머니, 이제 보니 자태가 참 고우십니다. 제가 그간 바빠서 몰라봤군요.”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얼마 전에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공부를 마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사장님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물었지요. 남자는 동대문시장 부근에서 완구 만드는 봉제공장을 한다고 그럽디다. 직원들은 십여 명 정도 되는 데, 유럽으로 수출을 한다더군요. 저는 그 사장이라는 남자가 참 좋은 일 많이 한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를 쭉 훑어 내리자, 남자의 시선도 어느새 절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더라고요.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사장과 가정부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의 웃음이었던 겁니다. 알잖아요. 서로 눈빛만 봐도 이 남자가 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렇게 얼마가 지났는데, 하루는 그 남자가 ‘우리 식사를 따로따로 할 게 아니라 같이 먹읍시다.’라고 합디다. 난 기겁을 하면서, 감히 언감생심 그럴 수는 없다고 했지요. 거실에 걸려있는 여자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볼 것만 같았거든요. 몇 번을 거듭하길래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거 참 묘하더군요. 저녁에 불을 끄고 방에 누우면 그 남자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거예요. 뭔가 가슴이 허전하기도 했고요. 전 그게 뭔지를 몰랐습니다. 남자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 봐요. 하루는 남자가 폭탄 제안을 하더군요.
“아주머님, 우리 이러지 말고 합칩시다.”
처음엔 가족들이 있는데 같이 살자니 말이 되느냐, 하면서 당연히 거절했지요. 일주일이 흐른 뒤 남자가 또다시 꺼내더군요. 에라, 모르겠다. 삼수갑산 갈망정, 나중에 본부인이 돌아와 철퇴를 휘두르더라도 일단 사람답게 살아보자. 결국 합쳤습니다. 거기에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저와는 달리 딸아이는 사장님을 닮아서 키도 훤칠하고 눈매도 서늘하니 밉상은 아닙니다. 저는 딸의 앞날을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남자의 호적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주저하는 남자를 끝까지 설득해서 딸을 호적에 올렸습니다.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본부인이 다 큰 아이들과 함께 떡 하니 나타났습니다. 의외로 부인이 침착합디다. 절 보고 수고했다면서 이젠 나가 달라고 조용히 그러더군요. 저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남자가 얼마간의 돈을 통장으로 넣어 주더군요. 나가서 방이라도 얻고 당분간 생활하라면서요. 돈에 맞는 집을 찾다 보니까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된 겁니다. 생활이 힘들어지자, 딸아이는 아버지한테 가겠다고 몇 번이나 우겨댔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혼쭐을 냈지요. 모녀지간 인연을 끊고 가라고요. 결국 제가 알바에 폐휴지를 모아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은 지치고 병이 들더군요. 집에 앓아누워있는데 집주인이 들려서 그럽디다. 동사무소에 가서 사정을 하면 먹을 것도 대주고 치료도 해준다고요. 그래서 생전 처음 관공서라는 곳을 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호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어려운 문제일 줄은 몰랐습니다. 동장님,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좀 도와주십시오. 정말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난 그 여자에게 설명을 해줬지. 우선 필요한 것은 호적부터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보증인도 세워야 하고, 법원에서 재판도 받아야 한다고 했어. 처음엔 그 여자의 호적을 만들려면 고향인 삼례 하리에서부터 추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 그런데 인우보증을 받으려고 생각하니까, 이게 너무 옛날 일이더라고. 게다가 아직까지 그곳에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도 의문이고. 설령 살고 있더라도, 뜬금없이 찾아가 협조해달라면 잘 해주겠냐고. 난 여자에게 후암동 그 남자를 찾아가서 그 집에 들어가게 된 경위라든가 살아온 사실을 확인받아 오라고 했지. 한 달쯤 지났나. 여자가 다시 찾아왔더라고. 노란 봉투를 내밀었어. 확인서를 겸한 인우보증서였지. 그래서 난 그 여자와 함께 법원으로 달려간 거야. 사실 동장인 내가 일상을 제켜놓고 그렇게까지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 여자한테만은 딱 거절할 수가 없더라니까. 직원들도 나를 보고 웃으면서 그러는 거야. 동장님, 혹시 그 여자한테 마음 두시는 것 아니냐고. 하도 엉뚱한 소리라 모두가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그게 묘하게도 뒤끝이 남더라니까.
“그럼 네 말은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일을 해주었다는 게 정말 아니라는 거야?”
“아니, 너까지 날 그렇게 몰아붙일래?”
그 여자와 함께 서류를 들고 법원으로 가서 신청을 했지. 비용 드는 것도 내가 다 처리했고. 점심도 사주고. 성본창설허가 즉 가족관계등록부 창설허가를 신청한 거였어. 그때는 말이야 서류에 철자 한자라도 틀리면 다시 써 오라고 퇴짜를 놓던 시절이었어. 아마 대부분이 변호사를 사서 하는데 나만 몇 번을 수정해가면서 혼자 했지. 결국 해냈어. 몇 달이 걸렸는지 몰라. 재판정에선 여자가 답변을 했지. 판사도 처음엔 오랜 세월을 호적 없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쉽게 납득을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어. 결국엔 허가를 해주더라고.
난 허가서를 들고선 곧장 구청 민원실로 달려갔어. 여기서부턴 자네도 알잖아. 내가 직접 가족관계 등록부 신청을 했지. 마침 민원실 팀장이 나랑 같이 근무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바로 해주더라고. 서류가 만들어지자마자 등록부 서류를 떼어가지고 이번엔 신창동주민센터로 달려간 거야. 그곳은 내가 근무했던 곳이잖아. 일사천리였지 뭐. 주민등록부를 바로 만들고 주민등록증이라는 것도 만들어줬지. 그때 딸아이 이름을 처음 알았어, 장혜민.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어. 바로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하는 문제가 남은 거야. 이 문제는 좀 신중해야 했어. 왜냐면 내가 여자 말만 들었지 집안 경제 사정은 모르잖아. 그래서 담당 직원을 불러서 정확하게 조사하도록 시켰지. 그런데 정말 형편없더라고. 구청에서 직원들이 현장답사를 나오더니 결국 지정되었다고 통보를 해주더라고. 한 가족을 살린 셈이었다고나 할까.
“자, 1탄은 여기까지야.” 라며 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아니, 2탄은 언제 하려고 그래?”
“음, 2탄은 내 머리 속을 정리해야 해.”
“뭐가 그리 복잡해? 아무튼, 이거 정말 훈장감이다. 안 그래?”
“놀리기는.”
“아냐, 농담 아니고, 정말 표창감이야. 어려운 일을 창의적으로 해냈다는 게 장한 일이잖아.”
민수가 경식의 빈 잔에 막걸리를 가득 채웠다. 막걸리 특유의 하얀 거품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였다. 경식이 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거린다.
“근데, 너 설마 그 여자하고 뭔가 엮인 것 아니지?”
민수는 다분히 장난기 어린 말투로 경식을 을러댔다. 경식은 다시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더니, 한 모금 가볍게 목을 축였다. 잔을 내려놓은 후 팔을 턱에 괸 후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의 다음 말이 2탄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 일이 끝난 후 여자가 여러 번 주민센터로 심지어 집으로까지 찾아왔었다고 했다. 올 때마다 김치라든가 음식들을 해가지 와서 처음엔 고마운 마음에 그러려니 했는데 여자의 눈빛이 달라져 있더라는 것이다. 경식이 혼자인 줄 알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었다. 민수가 한마디 내던졌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잘 해보지 그랬어?”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경식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속으로 한마디 했다.
‘실은 말이야, 내 관심은 그 여자가 아니고 그 여자 딸이라고. 물론 말도 안 되겠지만.’
“흠, 아무튼 그 여자와의 그림도 나쁘진 않겠어. 잘 한번 해 봐. 황혼의 로맨스!”
민수의 농담에 경석은 한바탕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다른 손님들이 없어서 그런지 식당 안이 이들의 웃음소리로 유쾌하게 울렸다.
민수가 경식을 만난 지도 한 계절이 훌쩍 지나갔다. 가까운 수목원의 꼿꼿하던 억새 대공들이 하얀 모습으로 변신하더니 드디어 고개를 숙였다. 붉은 단풍나무들도 이미 이파리를 떨구고 겨울 채비에 들어갔다. 민수나 경식에게 12월은 가장 바쁜 달이다. 다음해 예산안과 사업계획을 확정해야 하고 시의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 시기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도 연초 사업계획에 대한 부서 내 워크숍이 기다리고 있어서 숨 돌릴 여유가 없다. 그런 와중에 경식이 주말에 시간을 내서 북한산 등산을 가자고 제안했다. 바쁜 일정을 피해 이리저리 날짜를 맞추다보니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주말에 가기로 했다.
새벽부터 서둘렀다. 금방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 부을 듯 하늘은 짙은 잿빛 구름이다. 조금 멀기는 한데 북한산 영봉(靈峰)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등산로가 얼지 않아 아이젠은 배낭에 도로 넣고 스틱만 손에 들었다. 우이역에서 시작한 등산은 수월했다. 의외로 산을 찾는 이들이 많아 좁은 등산로가 붐볐다. 백운대 영봉이 빤히 보이는데도 구불구불 산길을 타다보니 거리가 쉬이 좁혀지질 않았다. 잠시 너럭바위에 앉아 따끈한 커피와 빵을 꺼냈다. 어디선가 새 울음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아니, 저게 무슨 새야?” 경식의 물음에,
“글쎄, 황량한 계곡에 처량한 새 울음소리라….” 민수가 받았다.
혹시, 마누라 도망가서 찾는 소리 아냐? 민수의 농담에 둘은 오랜만에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영봉은 계곡과는 달리 바람결이 차갑고 매서웠다.
“그런데, 너 여기 왜 오자고 한 거야?” 민수가 물었다.
“영봉(靈峰)은 말이야 ‘산악인의 영혼의 안식처’ 라고 한대. 그래서 나도 위로 겸 응원 좀 받아 보려고.”
경식의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민수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해댔다.
‘위로는 뭐고, 응원은 또 뭐야? 혹시, 이 친구 그 여자와 관계가 깊어져서 정리하려고 이러는 거 아냐?’
“나 명퇴하고 내년에 시의원선거에 나가보려고.”
폭탄선언이었다. 민수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정말이야?”
경식은 정치할 녀석이 아닌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민수로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치라는 게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선거하려면 돈도 있어야 되고,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들도 많아야 되는 데 넌 가족조차도 없잖아. 가능해?”
“응 내 옛날 주민센터 자치위원회에서 적극 밀어주기로 했어. 그리고 자금이나 지원은…….”
경식은 뭔가를 얘기 하려다가 뒷말을 흐렸다.
코앞에 있는 인수봉 주위로 짙은 회색 구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둘은 하산을 서둘렀다. 점심은 우이역 부근에서 하기로 했다. 등산로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난데없이 우이천 계곡과 마주치는 등산로 위에 거대한 철조망 출입구가 나타났다. 문을 잠가놓아 난간을 붙들고 돌아서 나가야 했다. 민수가 먼저 돌아나가자 경식도 철주를 붙잡고 가볍게 시도했다. 그런데 등산복의 옷소매와 바지가 날카로운 철조망에 걸리고 말았다. 당황한 나머지 이를 떼어내려고 힘을 주자 옷은 허망하게 더욱 찢어졌다. 하얀 안감이 속살처럼 드러났다. 등산을 마무리하려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너무나 황당했다. 민수는 경식의 펄럭이는 재킷 안감을 보니 무슨 백기가 휘날리는 느낌이었다. 대충 조치를 하고서 식당부터 찾았다. 따끈한 국밥집을 선택했다. 둘 다 경식의 등산복이 신경 쓰였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이 조용했다. 민수는 경식과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기서 커피도 마시고, 2탄 마저 하지 뭐.”
“그럴까.” 경식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한동안 그 여자가 뜸 했어. 나도 몰랐는데 그 여자가 오래전에 이사를 갔더라고. 의정부 쪽으로 갔대. 거참, 그렇게까지 도와주었는데 고맙다 소리 한번 안 하고 갔다니까 왠지 좀 서운한 생각이 들더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여자가 날 의심했던 것 같아.
“아니, 뭘 의심해, 너 같은 순둥이 놈을.”
전에 말했잖아, 딸 혜민이라고. 그땐 이미 대학생 나이였는데 돈이 없으니까 알바를 하고 있었거든. 애가 키도 늘씬하고 외모도 준연예인급이었어. 그런데 이 친구가 동사무소를 지나가다가 가끔 들리는 거야. 그게 우연인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자주 들렸어. 어떤 때는 붕어빵도 사서 들고 오고, 아이스크림도 사들고 오고 그랬지. 난 그냥 그러려니 했어. 그런데 그 애 엄마가 우리 사이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 거야. 얼마 지나서부터는 딸아이가 발걸음을 뚝 끊어버리더라고. 나중에 안 거지만 의정부로 이사를 했던 거지. 그런데 몇 달 전부터 혜민이가 내 사무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찾아왔더라고. 그간의 자초지종을 물었지. 어머니는 잘 계시느냐고. 별안간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거야. 난 깜짝 놀랐지. 그럼 왜 연락을 안 했느냐고 나무랬지.
두 모녀가 의정부로 이사 가기 전에 후암동에서 연락이 왔었다는 거야. 그 사장 남자가 죽었다고. 그런데 그 남자, 즉 혜민이 생부의 유언이 있었다는 거야. 그 집의 재산이 상당했나봐. 봉제공장과 현금 얼마를 딸 혜민이 앞으로 남겼대. 그 현금을 가지고 의정부에 집을 사고 임야를 좀 사뒀나 봐. 혜민이는 봉제공장을 총괄하던 공장장 하고 결혼도 했고. 그런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엄마가 폐암을 앓게 되었다는 거야. 공장에 집까지 있어서 생활보호대상자의 지위는 이미 상실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봉제공장마저 문 닫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더군. 봉제업이 한 때는 돈벌이가 되었는데, 동남아 아프리카에서 싸구려에 독특한 디자인들이 쏟아지니까 경쟁이 안 되더라는 거야. 이미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거지. 거기에다가 엄마마저 몇 년을 앓더니 저 세상으로 갔다는구먼. 남은 게 혜민이잖아. 사정이 그런데도 혜민이 남자 놈은 노름에 마약에까지 손을 댔대. 큰집까지 갔다 와서도 끝내 손을 못 털었나 봐. 결국 갈라섰대. 모녀의 인생사가 되게 꼬인 거지. 엄마나 딸이나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하느님도 너무 하신 것 아냐?” 민수가 받았다.
그때부터 혜민이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날 찾아오는 거야. 어떤 때는 점심때 오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금요일 저녁 퇴근 무렵에 전화로 불러내는 경우도 있고. 처음엔 가까운 친척이 없으니까 보호자로서 날 찾는가 보다 했지. 그런데 한참을 지나다 보니까 어느새 내가 혜민이한테 푹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자네도 알다시피 나 외기러기 생활하고 있잖아. 언젠가 혜민이한테 그 얘기를 한 것 같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 뒤로 더욱 빈번하게 찾아왔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혜민이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마음뿐이었고 행동이 따라가지 않더라고. 나도 외로운 몸이었고, 혜민이도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게 아니겠어. 결국 둘이 의기투합했다고나 할까.
“잘 한다 짜식. 그래서 선을 넘었다는 거야?”
경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술잔만 바라보더니 계속했다.
그 뒤로 주말에 난 혜민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놀러 다녔지. 어떤 때는 가평, 양주에 펜션을 빌려서 묶기도 했고.
“설마, 애까지 생긴 것은 아니겠지?”
“아냐, 인마!”
넘겨짚는 민수의 폭탄 질문에 경식이 눈을 치켜뜨며 극구 부인한다.
“그럼 뭐야, 말하려는 요지가?”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
침묵하는 순간 둘의 머릿속은 슈퍼컴퓨터처럼 광속도로 돌아갔다. 먼저 말을 꺼낸 경식의 눈은 민수를 향해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 이 친구야, 날 그렇게 이해해주질 못하나. 꾀복쟁이 친구가 뭐냐. 지금 이 순간 내가 말을 안 해도 알아차려야 할 게 아닌가. 십 년 이상을 독수공방하고 있는 것을 안다는 친구가 현실적인 답변을 못해 주나. 난 혜민이를 사랑하고 있고, 혜민이도 저렇게 날 쫓아다니는데 말이야. 좀 응원해 줄 수는 없겠느냐고.’
‘헉, 얘 좀 보게. 큰일 날 친굴세. 이러다가 애까지 생기면 후처가 될 텐데 어쩌려고 저래. 크게 될 사람이 신상관리를 저렇게 문란하게 하면 안 되지. 허리 아래 관리 잘못하다간 평생 신세 망친다고. 만약 캐나다에 있는 식구들이 알아봐. 당장 내일에라도 도끼눈 뜨고 쫒아올 텐데. 그런데도 두 집 살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사랑 타령은 연예인이나 가수들 몫으로 남겨두라고. 이걸 어떻게 말리나. 큰일이군.’
민수가 경식에게 캐나다의 가족들 얘기를 꺼냈다.
“그곳 애들은 이미 대학까지 졸업한 거 아니야?”
“졸업했지.”
“그럼 들어와야지.”
“취업을 했다나 봐. 한인기업체에 들어갔다고 그러더라고.”
“그럼 제수씨는 들어와야 하는 것 아냐?”
경식이 갑자기 한숨만 내쉬며 또 침묵에 들어간다.
“왜 그래, 무슨 문제가 있어?”
경식은 어려운 말을 꺼내기라도 하는 듯이 몇 번을 주저주저했다. 결국 험한 말을 거칠게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좀 창피한 얘긴데, 얼마 전에 큰 애한테서 연락을 받았어. 부인이 어떤 남자와 사귀는 것 같다고 했다.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지만 아들이 제 엄마에 대해서 이 정도로 말한다면 엄마의 행동이 결코 정상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사실 경식이 언제 아내로부터 연락을 받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특히 경식이 통화를 하려고 해도 부인이 전화를 고의로 안 받는지 통화가 안 된다고 했다.
“야, 그렇다고 너까지 막가파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잖아. 혜민 씨와 관계를 지속하겠다면 먼저 지금 제수씨와의 관계부터 정리해야지.”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냐고. 연락이 안 되는데.”
“그래도 그렇지, 인마. 넌 공무원이라고. 또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한다면서.”
“?”
“그런데 상대방에게 호재거리를 제공하려고 그래?”
“이건 프라이버시에 관한 문제잖아.”
“아이고, 이 순진한 녀석 좀 보게. 프라이버시 좋아하네. 넌 인마 놈들의 밥이 되고 인생은 초토화 되는 거야. 정리부터 먼저 하라고.”
“야 인마, 넌 친구라면서 날 좀 응원해 줄 순 없니?”
민수는 순간 미안한 감이 들었다. 공직생활이라는 것도 결국은 생활 수단에 불과한 건데. 인생의 행복에 걸림돌이 된다면 뭐가 우선순위일까. 민수나 경식 모두가 찜찜했다. 경식이 놈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남자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좋기는 했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라 답변을 내기가 어려웠다.
“설마 3탄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아니야.”
경식이 강하게 부정했다. 복잡한 속내가 뒤엉킨 가운데 명확한 결론도 없이 그날 등산 겸 식사자리를 마무리했다.
1월 중순, 경식은 명퇴를 했다. 지방선거에 뛰어든 것이다. 경식의 동장 초임지였던 신창동 지역주민자치회의에서 군자당 시의원 후보로 강력 추천한다고 했다. 두 개 동만 확실하게 잡으면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경식이 동장을 할 때 주민들에게 워낙 잘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대부분 재개발지구 주민들인데, 그들은 재건축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개발을 하면 마을이 해체되는데다가 재개발을 해도 상당한 부담금이 돌아오기 때문에 결국 재건축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시의원 한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경식을 밀겠다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선거판 열기로 달아오를 무렵, 민수는 동창회 총무인 상민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경식을 돕자는 얘기였다. 선거에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간에 기별이나 가겠느냐고 민수가 신통찮은 반응을 보이자, 상민은 그래도 동창인데 동창회에서 십시일반으로 좀 도와주어야 할 거 아니냐고 했다. 당연한 얘긴데, 선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했다. 몇 억을 쓰고도 낙마한다고 그랬다. 더구나 경식은 겨우 아파트 한 채뿐이다. 시골 깡촌에 논밭 있어봤자 무슨 도움이 될까? 그렇다고 동창이라는 녀석들이 그냥 뒷짐만 지고 바라볼 수만도 없는 노릇 아니냐고 했다. 결국 기십만 원씩 후원하기로 했다.
“그래 알았어. 일단 자네 통장번호를 단체 카톡방에 띄우라고.”
상민이 전화를 끊으려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잇는다.
“혹시 우리가 몸으로 도울 방법은 없을까”
주중은 어렵고 주말엔 가능하다고 했다. 명함 돌리기나 후보자 간판 들고 지하철역이나 아파트 입구에서 홍보를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민수는 즉각 반대했다.
“그거 표 떨어지는 방법이야.”
“왜? 도와주면 좋잖아.”
“넌 이해 못하지, 꼰대들이 나서면 오히려 표 떨어진다고.”
지하철역 입구나 아파트 입구에서 신문 보라고. 아저씨들이 전단을 돌리거나 아파트 투자하라고 찌라시 돌리면 어떻게 하지? 그거 안 받으려고 멀리 돌아서 가잖아. 마찬가지야. 나이 많은 아저씨가 명함을 가지고 역이나 네거리, 아파트 입구에 서서 돌린다고 서 있어 보라고. 젊은 사람들, 특히 여자들, 아줌마들이 받겠느냐고. 그리고 현실적으로 후보 간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나 홍보 전단, 명함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라고. 전부 젊은 여자들이잖아. 모두가 나란히 서서 합창하는 것 안 봤어?
‘기호 0번 아무개입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명함을 돌리잖아. 아가씨가 돌리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지. 그런데 주름진 얼굴에 머리까지 희끗희끗한 장년 아저씨들이 뭔가 돌린다고 서있어 보라고. 맞은편에서는 쭉쭉 빵빵한 여자들이 화장 짙게 하고서 합창하고 있는데 말이야. 아마 표를 긁어모으는 게 아니라, 표 떨어지는 데 일조할 거라고.
듣고 보니까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다. 역시 공돌이 출신이라 잘 아는구먼. 알았어. 그럼 후원금만 보내. 꼭 정해진 금액만 보내려고 하지 말고 뭉텅이로 보내도 돼. 고맙게 받아줄게. 알았지? 경식이가 되기만 하면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는 연줄이 생길 수도 있잖아. 한바탕 폭소를 터트리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통화를 끝맺었다.
경식이 낙선했다는 소식은 TV 선거방송을 통해서였다. 저녁 11시쯤 결판이 났다. 매우 근소한 차이였다. 아마 천표 차이도 나지 않은 듯했다. 정말 치열했다. 민수는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이른 새벽에 경식의 전화를 받았다. 이제사 몸을 추스른 모양이었다. 민수도 그간 굳이 위로전화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아픔을 이겨내게 하는 게 나을 듯했기 때문이다. 경식은 다른 동창들한테도 고맙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하고 창피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민수는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그래도 단체 카톡방을 통해서 고맙다는 얘기는 하라고 했다. 그런데 불현듯 그 많은 선거비용을 어떻게 댔는지가 궁금했다.
“누가 후원한 거야? 그 동네 대기업도 없잖아. 넌 집도 겨우 아파트 한 채뿐이고.”
“맞아, 내가 팔 집이 어디 있겠어.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받았지. 그리고 크게 도와준 사람이 있었어.”
“너 혹시…, 그 여자?”
“그래, 혜민 씨가 도와줬어. 의정부에 있는 혜민 씨 소유의 유실수 땅 일부를 팔았어. 그녀가 없었더라면 선거 못 치렀을 거야. 선관위에서는 겨우 6천만 원 정도를 지원해주는데, 실제로는 아마 억대도 넘게 더 들어갔을 거야. 선거운동원들 유니폼과 홍보전단, 게다가 고성능 스피커가 달린 유세 차량을 보름 동안이나 빌렸으니까.”
이젠 경식이도 실업자가 되었다. 무엇을 할지에 대해선 서로가 함구한 채 전화를 끊었다. 마치 금기어처럼 입 밖에 내기가 그의 상처를 더욱 긁어대는 것만 같았다.
민수가 혜민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것은 도로확장 부지의 토지보상 문제로 민원인들과 한창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경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교차로에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였는데 119로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이야. 민수는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입원해 있다는 세브란스로 향했다. 10층 입원실의 승강기가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혜민 씨가 목례를 하며 민수를 안내를 했다. 다행히 치료는 잘 되었다고 했다. 다만 부러진 다리가 붙고 걷기까지는 몇 달이 걸린다고 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외과병동이라 그런지 어수선했다. 경식을 보니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침대 옆에 혜민과 나란히 앉은 민수가 말을 꺼냈다.
“어때, 견딜 만 해?”
대꾸도 없이 경식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캐나다에 있는 부인이 잠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더 심각해졌다고 했다. 부인이 경식과 혜민과의 관계를 알고서 뭔가 담판을 지으러 온 거 같다는 것이다. 경식이도 문제지만 사실 그의 부인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데 그걸 숨기고 적반하장 격으로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참에 갈라서자며 위자료로 수억 원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집이 오륙 억쯤 되니까 절반을 달라는 셈이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갈라서야지. 달라면 주고.”
묻지도 않은 혜민이 경식이의 말을 이어서 대꾸했다.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다시 일어설 거고요. 선거 말고요. 의정부 남은 땅에 정원수를 심어서 조경회사에 납품해보려고요.”
혜민은 성장속도가 빠른 서양측백나무하고 블루베리 묘목을 심어볼 계획이라고 했다. 민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힘을 모으면 어렵지 않은 일 같았다. 혜민의 ‘우리’라는 말이 머릿속에 긴 여운으로 남았다. 경식이 병실 밖에 부인이 와있다고 했다. 민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인사 정도는 해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이 가볍질 않았다. 복도 한쪽 의자에 앉아있는 경식의 부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같이 있는 젊은 친구는 아들로 보였다. 민수가 다가가자 부인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민수를 3층 식당가로 이끌었다. 일방적으로 음료수와 먹을 것을 주문했다. 옆에서 불안한 기색으로 앉아있는 아들을 소개했다. 순간 민수는 아들에게서 경식의 모습을 찾으려고 위아래를 훑었다. 부인의 모습을 보니 키는 그대로인데 몸집은 두 배는 불은 듯했다. 정말 복덕방 아줌마, 아니 분식집 아줌마라고나 할까. 외지에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 힘들게 살아온 티가 역력했다. 캐나다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물으려다 그만뒀다. 차가 나오기도 전에 부인이 먼저 일방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그간 경식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솔직히 말해달라는 표정이었다.
“그 여자 말이에요. 애 아빠와 어떤 관계예요?”
민수는 그 여자가 혜민 씨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참 생각 끝에 민수는 경식이 혜민 모녀를 만나 도와준 그간의 사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 해주었다. 선거도 그녀 아니었으면 못 치렀을 거라고 했다. 물론 부인의 관심사는 함께 사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했다. 민수는 전적으로 부인했다. 가끔 와서 도와주기는 해도 동거하는 사이는 아니라고 했다. 특히 남녀 스캔들을 가지고 어떻게 선거를 치를 수 있겠느냐며 극구 부인했다. 여자는 고개를 외로 틀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지금도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의미였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민수 당신도 경식과 한통속 아니냐며 날카로운 목소리와 눈에 칼을 세운 모습이 올빼미 눈이었다. 민수는 자신이 부인보다도 경식의 옆에 더 오래 있었던 것 아니냐며 같이 언성을 높였다. 결국 민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아들이 보내온 메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남자와는 어떤 사입니까?”
순간 부인의 동공이 산동제라도 넣은 듯 달덩이 만하게 커졌다. 민수는 경식보다는 부인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부인은 아들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한쪽으로 끌고 갔다. 뭐라 다그치는지 부인은 아들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아들은 그저 묵묵부답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씩 툭툭 내던지는 듯했다. 모자간의 언쟁이 진정된 듯 다시 돌아오더니, 민수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는 아들놈이 아빠와 이처럼 내통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자기도 남편과 떨어져서 너무 오래 지내다 보니까 현지 교포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민수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게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전 경식이나 부인의 외도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오히려 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부부란 함께 살아야 부부지요. 주말부부도 힘든데 몇 년씩 보지 않고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날짐승, 들짐승도 때가 되면 짝을 이루고, 새끼를 낳아 알콩달콩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물며 사람이 십여 년을 떨어져서 산다는 게 부부로서 할 짓입니까. 아들이 있어 말하기 곤란합니다만 경식이도 남잡니다. 게가 신부입니까? 중입니까? 극히 정상적인 남자예요. 그런 사람을 그렇게 오래 방치한다는 건 제수씨에게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경식이는 부인과는 달리 성인군자처럼 견뎌왔어요. 부인이 의심하는 혜민 씨 말입니다. 여자로서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이번 선거, 그 여자 없었더라면 못 치러냈을 겁니다. 당락이 문제가 아니라 둘이 일체가 되어서 뭔가를 시도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물론 당선되었더라면 금상첨화였겠지요.”
민수가 잠시 뜸을 들였다. 여자도 고민하는 게 역력했다. 아들이 엄마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좀 전 같았으면 심하게 뿌리쳤을 텐데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뭔가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민수는 결정적으로 한마디 해주는 게 좋을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아무 조건 없이 조용히 갈라서십시오. 이미 두 분은 서로 다른 생활에 익숙해져서 다시 합치기란 어려울 겁니다. 경식이 정말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아시잖아요. 가진 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뿐인 것, 돈 모을 여력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매달 말일이면 부인에게 돈 부치느라 바빴는데요. 제가 보기엔 경식이가 바보든지, 고자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아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듯했다.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고 둥둥 떠 있던 얼음 조각들은 모두 녹은 듯했다. 민수가 먼저 일어서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얼핏 들은 얘깁니다만 ‘부부란 서로 반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써 전체가 되는 것이다.’ 라고 그러더군요. 결합해서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경식이 편히 놔두고 가세요. 서로 다른 생활방식의 차이를 인정하시라 이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돈입니까? 선거 치르느라 완전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더구나 제수 씨도 돈을 요구할 입장은 아닌 것 같고요.”
민수는 곧장 병실로 향했다. 민수가 경식이와 잠시 얘기를 나누겠다고 하자 혜민이 자리를 비켜줬다. 부인과 아들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경식이 연신 고맙다고 했다. 아내가 정말 깨끗하게 물러나 줄지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혜민 씨가 궁금했던지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이야기를 끝낸 민수는 잠시 밖에서 찬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경식이 몸을 일으키려다 뒤로 쿵하며 넘어진다. 혜민이 급히 다가가 부추겼다. 경식이 민수를 향해 가지 말고 꼭 다시 오란다.
민수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한참 명상에 젖었더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경식의 병실로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그는 마음을 돌렸다. 더 이상 경식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낀다는 자체가 오히려 팔불출 같아 보였다. 정신을 차린 그는 정차해 있는 버스에 무심코 올라탔다. 항동 수목원까지 가려면 신촌역에서 내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얼떨결에 눈을 뜨고 보니 버스는 이미 홍대입구역을 지나고 있었다. 당장 내릴 수도 없고, 도대체 이 버스 어디로 가는 거야. 흠, 그래, 한 번 가보자고,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민수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 깊숙이 몸을 웅크렸다.
‘십여 년을 돌아서 가는 사람도 있는데 몇 시간쯤이야 대수겠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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