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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들의 대만 기행
정종량
1. 작당
매서운 한파가 휘몰아치는 11월초 익산군 왕궁면 온수리 사람들 8명이 40여 년 만에 만나 해외여행 길에 나섰다. 이들은 동네 친목계 모임의 회원들로서 모두가 그 유명한 58년 개띠들이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같은 초등학교 출신들은 아니다. 대부분이 삼례초등학교 출신들인데 몇몇은 영신초등학교 출신도 있다. 집안이 조금 못사는 아이들은 당시 영신초등학교를 다녔다. 때문에 그때는 어린 마음에 상처도 입었고, 어쭙잖은 자격지심에 서로가 냉랭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온수리’라는 고향 마을로 인해 한마음이 되었다. 이들의 행선지는 대만이다. 그렇다고 여행이 미리부터 계획된 건 아니다. 오랜만에 모이다 보니 누군가가 기왕 모이는 것 해외여행으로 하면 어떨까하는 제안이 있어 따른 것이다.
온수리는 말 그대로 온수가 나오는 동네라는 뜻이다.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솟아나던 곳이다. 그래서 한 겨울 동네 초입에 들어서면 멀리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곤 했다. 최근에 업체가 돈 푼이나 될까해서 달려들었다. 그래서 동네 어귀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온천탕을 만들었다. 온수리는 완주군 삼례읍에 붙어 있어 교통의 요지이다. 다만 그 경계를 호남 고속도로가 서울을 향해 가르마 타듯 거칠게 뚫고 내달린다. 멀리 동네 입구 쪽으로는 널찍한 4차선 국도가 논 가운데 우뚝 선 온천탕을 곁눈질하며 익산을 향해 질주한다. 북쪽으로는 00산 밑자락에 왕궁저수지가 있었는데 한 때는 물고기가 많기로 유명했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낙시꾼들이 빼놓지 않고 들리던 곳이었다. 왕궁면이라고 해서 처음엔 백제시대 왕궁터라도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실제 왕궁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마한시대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오래된 유적이 발견된 적은 있다고 했다.
온수리가 달라진 것은 온천탕으로부터 시작된다. 업자들이 달려들어 지하수를 뽑아 올렸다. 이로 인해 동네의 온천수는 물론 농업용수까지 말라붙었다. 수도가 들어오면서 그나마 불평은 가라앉았지만 동네의 옛 명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쪽 마을에 들어선 나환자촌은 온수리의 퇴락을 더욱 부추겼다. 그들은 정화되지 않은 가축분뇨를 사정없이 쏟아냈다. 결국 부근에 위치한 저수지가 망가졌고 동네논이며 밭까지 돼지 배설물로 뒤덮여 농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심한 악취로 인해 주민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 나환자촌에서 자체 정화시설을 갖추기는 했지만 결국 저수지는 매립되어 옛 명성만이 남아있다. 농토의 지력도 예전만큼 회복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곳에서 낳고 자란 젊은이들 중에는 S대를 나온 의사며, 변호사, 부동산 재벌 그리고 주식 재벌도 있다고 한다.
공항으로 향하는 58년 개띠들, 그들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을까? 얼핏 보기에 시골 중년의 순박함과 중후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 내뱉는 말은 걸쭉한 욕설의 육자배기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보니 좌석들이 맨 뒤쪽으로 몰려있다. 3박4일의 시작이 어찌 처음부터 순탄하질 못하다.
2. 첫날 이야기
아침 9시 예정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타이베이 공항은 봄 날씨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모두 25명의 단체여행객이었다. 3쌍의 부부를 포함해서 여러 팀들이 모였다. 온수리 팀이 열 사람으로 가장 많았고, 나머지는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 친구간 등 두세 명씩 팀을 이루었다. 가이드의 이름이 ‘보혜’라는 이름이었기에 여성이려니 했는데 연세 지긋한 남자로 밝혀지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사연도 궁금했다. 이를 알기나 한 듯 가이드는 공항에서 타이베이 시내로 들어가는 내내 자기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설화처럼 술술 풀어냈다.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 주변은 산이 많아서 특별히 소개할 만한 이야기 꺼리가 별로인 듯 했다. 가이드의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한국인으로 서울 중구 명동에서 태어났단다. 부모님은 아이를 가졌을 때, 강원도의 유명 사찰을 찾아 태어날 아이의 운세를 점쳤단다. 그리고 고명한 스님으로부터 이름을 점지해 받았는데, 그게 바로 ‘보혜’라는 이름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잉태한 아기가 계집애인 줄로 알고 받아든 이름인데 낳고 보니 사내아이였다나. 부모님은 기왕 어렵게 지은 이름이라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불렀단다. 지금은 찾아오는 여행객들마다 본인의 이름을 가장 먼저 궁금해 해서 출발부터 아예 본인의 이름에 얽힌 사연 소개로 관광을 시작한단다.
관광의 첫 시작은 고색창연한 용산사였다. 1738년에 창건되었다니까 우리의 고찰에 비하면 역사가 그리 오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금색 지붕과 붉은 기둥, 신비롭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천장의 조각들은 예스러움과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그동안 천재지변과 전쟁 등으로 수차례 파괴되었지만 계속 복구해서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단다. 태평양 전쟁 때는 폭탄이 떨어져 본전이 소실되었는데도 관세음 보살상만은 전혀 손상되지 않아 부처님의 영험이 건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노인, 젊은이, 학생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경건한 몸가짐이었다. 그들은 가져온 시주물을 부처님 앞에 공손히 올리고 향을 피우면서 합장하는데, 너무나 진지했다. 그런데 풍기는 분위기는 우리의 절과 불자들 모습이라기보다는 신사를 찾아 참배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아마도 불교와 도교, 전통 토속 신앙이 한데 어우러져 그들 특유의 종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이어 101층 건물인 ‘타이베이 금융센터’의 전망대를 찾았다. 2004년 준공된 509미터 높이의 거대한 마천루다. 밖에서 보면 거대한 탑들을 층층이 쌓아올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겉모습은 대나무 마디를 본떠서 대나무 같이 곧고 바르게 치솟으라는 뜻으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타이베이 시내는 기대와 달리 그리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누추하게 살지만 모두가 알자배기 부자라고 했다. 한국의 부동산 부자처럼 사는 건물 또는 땅에 돈을 묵히거나 투자하지 않는다고 한다. 크지 않은 중소기업체가 수도 없이 많지만 모두가 유명한 일류 수출기업들이라고 했다. 곳곳에 전시된 산호와 옥으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은 우중충한 건물의 외관과 달리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이 건물의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89층에 있는 진동 감쇄기다. 초고층 건물에 바람이나 다른 원인의 진동을 잡아주기 위한 것이라는데 규모도 엄청나거니와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형체가 거대한 지구본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신비스러웠다.
오후엔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았다. 자기들 말로는 세계 5대 박물관이란다. 런던 대영박물관, 파리 루브르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에 비견된단다. 아마도 장개석 전 총통이 본토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유물들인 듯싶었다. 송, 원, 명, 청 등 네 왕조에 걸친 국보급 유물만 60만점이라니 부러웠다. 대형 가마솥과 종이 그 중 으뜸이었는데 그 안에 문자가 새겨진 청동유물이라고 했다. 세월을 실감케 하는 유물 중에 유물이었다. 그러나 이곳 보물 중의 으뜸은 ‘취옥백채’인데 경옥으로 만든 배추 형태의 조각품으로 이파리에 앉은 ‘여치와 메뚜기’가 금상첨화란다. 어느 정도 세밀한지 그 장인정신에 놀라울 뿐이다. 또 다른 경탄의 대상은 원형 옥 조각품이다. 한 개의 공구 안에 수십 개의 원형 조각이 들어 있는데, 나무도 아니고 흙도 아닌 돌덩이를 어떻게 그처럼 정교하게 새겨 넣었을까?
저녁 먹은 후에는 스린 야시장 구경에 나섰다. 종류별로 특화된 시장이 아니라 종합세트라고 할까 없는 게 없는 시장이었다. 우선 그 방대한 규모에 놀랐다. 다음은 먹을거리, 액세서리, 각종 펜시 제품 등 볼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놀랐다. 가족들 또는 젊은 사람들이 이 곳 전통시장을 찾아 즐기는 모습에 우리의 인사동 거리가 문득 떠올랐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술이며, 고기 등 먹을거리를 잔뜩 사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58년 개띠의 리더 격인 영균이 온수리팀의 소집령을 발동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소주와 스린 야시장에서 산 닭고기 등 풍성한 좌판이 벌어졌다. 영균이 환영인사 겸 건배사로 한 마디 했다. 술이 한순배 돌고 두순배 돌자 왁자지껄, 목소리 큰 놈이 왕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좌중을 정리하려는 듯 영균이 나섰다.
“우리도 이제 환갑이 아닌가? 놀아도 뭔가 의미가 있어야지. 또 어렵게 모인 마당에 이처럼 오합지졸 중구난방 식으로 놀면 안 되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잠시 뜸을 들인다.
“우리가 모두가 다 모인 것은 40년 만에 처음 아닌가. 따라서 각자가 돌아가면서 그 동안 살아왔던 인생사를 풀어 보는 거야. 사실, 온수리 고향이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서로가 모르잖아. 물론 몇몇 끼리는 알지 몰라도.” 모두가 좋다고 반응한다.
“그럼 첫 시작은 나부터 할께.” 영균이 먼저 하겠다고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러자 향순이가 가로막고 나섰다.
“얘는 말이야, 자기 얘기를 자기가 하면 무슨 재미가 있다고 그래. 그냥 자화자찬 할 거야? 내가 대신 할게. 시골집도 우리 집과 딱 붙어 있잖아. 제네집 숟가락 몇 개인 것까지 다 알잖아.” 모두가 박수를 쳤다.
(영균의 이야기)
영균의 이야기를 하려면 실은 동생 흥균이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 한다. 흥균이는 어릴 때 공부를 좀 했는지 전주에서 상고를 나왔다. 그런데 어중이때중이로 해서 학교를 졸업했어도 갈 곳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흥균이는 삼례, 익산, 고산을 오가면서 슈퍼에 물건을 배달했다. 오토바이로 새벽부터 전주 장에 가서 물건을 도매로 떼어다 시골 마트에 넘기는 거였다. 근데 열심히 했는지 이게 잘 되었다. 나중엔 차를 사서 크게 벌렸다. 아마 그 때 시골에서 수천만 원을 모았다고 했다. 거기에다 시골에 집 있겠다, 논밭 있겠다, 돈 들어갈 일이 전혀 없었다. 그대로 쌓일 수밖에 없어. 그런데 흥균이가 슈퍼를 오가면서 들은 게 있었다. 바로 주식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흥균이는 가진 돈을 당시에 잘 나가던 전자제품 주식에 모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버는대로 또 다른 주식들을 사 모았다. 그게 대박이 났다. 흥균이는 얄팍하게 자주 사고팔고 하는 것 보다는 사서 묵혀두는 전략을 썼다. 십여 년을 굴리니까 200억이 모아졌다고 했다. 거부가 되니까 배달 일을 집어치우고 전주에 사무실을 냈단다. 본격적으로 주식 투자에 달려들었다. 그 때 아버지 칠순 잔치를 했는데 하객들 차량이 삼례 우석대까지 늘어섰다고 했다. 그것도 거의가 밴츠, BMW, 최소 그랜저였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동네 마을회관도 그때 흥균이가 지어준거란다. 뿐만 아니고 지역 기부도 많이 해서 익산, 삼례, 전주까지 유지가 되었다. 또 동생 캐나다 유학도 보내줬고, 시골 부모님 집도 그 때 새로 지어드렸으니까. 들리기로는 제주도에 별장도 마련했는데 지금은 값이 천정부지라고 한다.
영균이 기지개를 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영균은 익산에서 고등학교를 겨우 나와 빈털터리로 동네 골목을 오가며 빈둥거렸는데 동생이 구제한 셈이었다. 흥균이가 형님도 사업이나 한번 해보라며 목돈을 손에 쥐어주었다. 뭘 할까 고심하다가 군 시절 휴가차 나왔다가 객기 부리러 들렸던 청량리 거시기가 생각났다. 즉시 전주 역 앞에 고급 룸살롱을 차렸다. 실은 룸살롱 플러스 588이었다. 그런데 양반도시 전주에 그렇게 장사가 잘 될 줄은 몰랐단다. 겉모습은 멀쩡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목적은 영 엉뚱한데 있었단다. 술은 오히려 다른 데서 걸치고 온다고 했다. 그런데 영균은 버는 돈을 다른데 굴릴 줄을 몰랐다. 쌓이는 돈을 가지고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으로 골프, 도박 등 갖가지 원정을 다녔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전주 가계는 아예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서울에 젊은 여자와 살림까지 차리면서 바람이 났던 것이다. 처자식은 고향에서 두 눈 뜨고 멀쩡하게 있는데도 말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영균도 외제차를 두 때씩이나 굴리면서 떵떵 거렸다. 하와이, 방콕, 발리까지 들락날락 했으니까. 그런데 ‘화무십일홍이요, 월만즉휴’라는 말은 몰랐던 게지. 결국 다 말아먹고 쪽박을 차게 되었단다. 가장 먼저 영균을 내동이치고 도망친 것은 바로 그 여자였다. 돈 있을 땐 간이며, 쓸개까지 다 내 줄 듯 하다가도 돈이 마르니까 눈치 빠르게 내뺐다.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마누라가 받아 줄 리가 없었다. 자식들이야 아비니까 함께 살고 싶었겠지만 마누라에겐 오래 전부터 웬수였다. 결국 서울에서 뭔가 찾을 수 있을까 돌아다니다 택시운전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게 제일 만만했다. 이젠 속도 차리고 개인택시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란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엄마였다. 영균이나 흥균이가 돈푼깨나 있으면서 외제차 굴리고 마을을 드나들며 거들먹거릴 땐 한 푼이나 좀 더 뜯어내려고 온갖 죽는 소리를 다했단다. 그런데 이젠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에 엄마가 경로당에 팥죽 먹으러 가다가 다리가 부러졌는데 글쎄 자식들한테 연락도 안했다는 거지 뭐야. 사정을 아는게지. 그리고는 시골집까지 팔아먹었대. 근데 산 사람이 바로 여기 있는 선희네라는거지. 아무튼 두 자식을 통해 부모가 때 늦은 인생공부를 한 셈이었다. 재밌는 것은, 날씨가 추워지면 영균 엄마가 손주들 한테 이렇게 말했대.
“너희 아빠한테 한 번 가봐라. 다른 여자랑 살고 있는지. 웬수라도 부부는 부부니까 함께 살아야 돼.” 정 그 놈의 정 때문에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향순이가 마지막을 명령조로 마무리 한다.
“빨리 합쳐라. 그리고 이젠 정신 차리고.”
“야 향순아, 내 얘기를 그렇게 밖에 못 해주나? 내 동생만 잘 났다는 얘기잖아. 그럼 승호 얘기는 내가 헐란다.” 영균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나섰다.
“그러시던가. 난 상관없어” 승호가 허락한다.
(승호의 이야기)
“너희들 승호를 우리랑 같은 58년 개띠로 알고 있지? 실은 우리보다 한 살 많은 형님, 오빠다.” 그렇다 승호네는 원래 삼례 후령리에 살았다. 그러다가 승호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온수리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 때 승호네 어머니가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처음에 생선 장사를 했다. 머리에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고산, 삼례, 왕궁을 휘젓고 다녔다. 삼복더위 한 여름이나 삭풍 칼바람 부는 겨울, 그 고생을 어찌 다 말로 하랴. 목표는 딱 하나, 자식새끼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게다가 농촌에서는 현금보다 쌀이나 보리를 받아야 하는 물물거래가 성행하다보니 물건을 팔면 함지박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렇게 해서 승호네 오형제를 키워냈다. 그런데 그 가난이라는 게 도무지 끊기질 않았다. 노력한답시고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승호네 누나는 시골 동네에서 오가다가 어떤 놈을 만나 짝짜꿍했는데 그만 애를 낳고말았단다. 그런데 알고보니 남자가 알거지였단다. 처지가 이렇다보니 애를 포기할 수 밖에. 즉시 입양을 보냈다. 지금도 그 아이의 소재를 모르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는단다. 물론 그 후 누이는 그 때 그 사람과 결혼해서 교문리에 살고 있다고 했다. 중화동에 음식점도 차려서 돈도 꽤 벌었다. 지금은 딸들이 이어 받아서 잘 하고 있단다.
그런데 누나가 무슨 맘을 먹었는지 강원도 평창 쪽에다 암자, 아니 기도원을 지었다. 당시 기도원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식기도 겸 살을 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때 숙박료를 2만원씩 받았는데, 지금이야 별거 아니지만 이십년 전엔 수입이 괜찮았다고 했다. 불상을 만들어 모셨더니 인근에서 불자들이 찾아와 시주도 듬뿍 했다고 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여자가 끼어들었다. 승호가 찾아온 불자와 눈이 맞아 놀아났는데 그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것이었다. 사실 승호가 한 여자에게 메일 사람은 아니잖는가. 결국 합의를 보고 아이를 지웠다는군. 그래서 공식적으로 승호는 아직 총각인 셈이다. 근데 그 시기에 남동생이 갑작스레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제는 제수씨인데 당시에 말이 많았다. 부인이 싸우다 밀어 넘어뜨려서 남편이 뇌진탕으로 죽었다는 설이 횡행했다. 반면에 동생이 만취해서 집에 들어오다 문턱에 걸려 넘어져 죽었다는 설도 돌아다녔다. 그래도 큰 문제없이 넘어갔단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모를 누가 모시겠는가. 바로 밑에 있는 진숙이가 모실 수밖에. 그런데 진숙이도 남편이 오래 전부터 뇌졸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니 남편 병수발에, 애들 그리고 부모님까지 건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결국 동네 사람들이 진숙이를 효부상에 추천했다. 도지사에 군수 효부상까지 두 개를 받아들었다.
“진숙이 형편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그래. 언제 기를 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순례가 덧붙인다. 그런데 승호는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주로 내려갔다. 어쩌려고 대형차량 운전면허증을 따낸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자가 운전면허증을 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을지 가히 짐작이 되었다. 필기만 해도 수도 없이 떨어졌다고 했다. 결국 운전면허를 따서 현재 시외버스 운전을 하고 있단다.
“야, 승호야, 너 운전하면서 지금도 막걸리 마시냐?”
“이제 끊어라 인마! 걸리면 끝장이야, 면허 취소라고.” 영균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승호의 사랑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잖아.” 그렇다. 승호는 시외버스 운전을 하다가 어떤 아줌씨 하고 눈이 맞았다고 했다. 영균이 승호의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좌중에 돌린다.
“자, 봐라. 인상이 어떤지.” 영균의 말에 누군가가 무당 같다는 소릴 흘린다.
“바로 그거야. 사별한 과부인데 듬직해 보이는 건 좋은데 뭔가 신기가 느껴지지 않아?” 그러자 승호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이 여자가 승호에게 엄청 잘 해준다는거야. 승호는 여자에게뿐만아니라 함께 사는 그 여자 딸에게도 잘 해 준다고 했다. 구두며, 핸드백까지 사주면서 친 딸 이상으로 잘 돌본다고 했다. 여자도 승호가 잘 해주니까 매달 용돈을 삼십만 원씩 정기적으로 준단다. 말로는 그 여자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지 한마디씩 거들었다.
“거 진짜야? 뭔 돈으로 용돈까지 줘?”
“승호야 너 술 먹으면 주사 조심해야 된다.”라며 승호네 아버지 얘기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안 해도 될 말을 했다. 승호네 아버지는 참 재미있는 분이셨다. 술만 들어가면 별별 얘기가 많았다. 이 사람 저 사람의 근거 없는 얘기들을 많이 주어 날랐다. 그래서 한 번은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멍석말이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가세가 펴서 그런대로 살고 있지만. 뭐라더라 승호의 여자가 그랬다는군.
“무슨 짓이든 다해도 다른 여자만 넘보지 마소.” 한 마디로 말해서 다 늙어 사랑을 알았다는 거였다. 영균의 얘기가 끝나자 승호가 맥주를 딸아 한순배 돌린다. 켄터키 치킨이라고 해서 샀는데 서울의 맛이 아니라 한다.
“한국의 치킨은 바삭바삭 하고 고소한 맛이 있는데 여기 것은 눅눅하고 간도 맞지 않아.” 말하는 선희가 오만상을 찌푸린다.
“자 다음은 선희 씨에게 바통을 넘길까요?”
“아, 난 얘기 못해. 연순아 네가 대신 사설 좀 풀어줄래?” 소주를 계속 마셔대는 바람에 눈이 반쯤 풀린 듯한 연순이 거절하지 않는다.
(선희의 이야기)
선희는 동생만 셋이야. 남동생 둘하고 여동생 하나, 명희.
“맞지?”
“응, 계속해.”
선희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확실치 않다. 그로인해 선희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쳤다. 그런데 나머지 셋은 고등학교 또는 대학까지 마쳤다. 정말 선희 엄마가 별별 일을 다 하셨다. 처음엔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삼례읍내에 나가 팔았다. 계절별로 봄엔 나물을, 여름엔 과일이며 채소를, 가을엔 과일이며 김장거리를 그리고 겨울에는 두부를 만들어 내다 팔았다. 한꺼번에 대학생이 둘일 때는 남의 집 품앗이도 했다. 물론 본인들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금 거들기는 했다. 그래도 엄마의 손톱은 다 문드러지고, 허리는 휜데다 머리마저 다 빠질 정도로 고생을 했다. 그런데도 엄마에겐 여전히 가슴에 맺힌 한이 맺혀있다. 바로 선희를 초등학교 밖에 보내지 못한 엄마로서의 죄였다. 선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안에서 엄마를 도와 온갖 잡일,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지나 가슴이 부풀어 오를 즈음 어떤 군인을 만났다. 남자가 대학생이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 넘어갔단다. 시골 처녀 농락하려고 사기 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선희가 거기에 넘어간게 아닌가? 그 사내와 계속 붙어다니다 보니까 선희에게 뭔가가 생겼단다. 그런데 문제는 그 놈과 헤어졌는데도 애를 낳았다는 것이다.
“인생 종 친거지. 가방 끈도 짧은데 새끼까지 딸려있으니 누가 거들떠 보겠어.” 승호가 덧붙인다. 그래도 선희네 뒷집에서 중매를 섰단다. 뭐 공사판 다니는 남자였다든가. 그 남자를 만나고 서울 대림동 어디에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그 애도 거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식도 안올리고 혼인신고도 안했다는 것이다. 선희가 정말 바보짓을 한 거라고 이구동성 떠들어댄다. 그 남자는 돈이 좀 모이니까 주식을 샀더란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남의 말만 듣고 계속 따라 했다는거지. 망하지 않는게 이상한거 아냐? 정말 남자가 쫄딱 망했단다. 결국 남자가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니까 나가버렸다. 아니지 가족을 유기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선희가 키우다시피 한 막내 남동생이 인천에서 부동산 소개소를 했었다고 한다. 누나 소식을 듣고는 집 가까운 곳에 편의점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물론 명의는 남동생이었지만 선희가 운영을 하고 있단다. 그것도 처음엔 잘 되더니 대형 편의점이 생기면서 손님들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수지는 근근이 맞추는 모양이다. 선희는 동생들 덕 좀 봐도 된다고 모두들 나섰다. 바로 밑으로 첫째 동생이 전주에 있는 모 대학을 나왔는데, 현대건설에 취직해서 돈을 좀 벌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대치동에 집도 한 채 있고. 그런데 그 올케가 동생을 꽉 틀어쥐는 바람에 시댁이건 친정이건 누구 도와주는 꼴을 못 본다고 했다.
“자기들끼리야 잘 살겠지.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세상을 자기들끼리만 살아갈 수 있는가. 필요할 땐 동구 간끼리 서로 돕고, 또 이웃도 도우면서 살아야지.” 모두가 한 마디씩 덧붙인다.
여동생 춘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쌍방울에 들어갔다고 했어. 전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애가 착실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전북대생과 연애를 했는데 결국 결혼을 했단다. 남자도 나중에 산림청 공무원이 되었다니까. 이젠 엄마도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지. 그런데 역시 세월이란 기다려주지 않는 법. 엄마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지팡이를 끌고 다닌단다. 그래도 얼굴만은 활짝 폈대요. 가끔 선희가 철부지 짓만 하지 않는다면.
“선희가 인천에 살면서 열 마리도 넘는 강아지며 들 고양이들을 기르고 있는 것 모르시지?”
“미친 짓 아니니? 한두 마리면 몰라도.”
“세상물정을 정말 모르는구나.”
그렇다. 선희는 세상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그 흔한 아이돌 얘기, 패션, 문화행사, 여행, 정치판 돌아가는 것 등 귀를 막고 살았다. 그러니 동창들 소식이야 깜깜 무소식일 수밖에 없다. 동물 말고 관심 있는 것은 딱 하나, 딸이다. 아비도 모르는 딸. 그래서 더욱 애잔한지도 모른다. 모두가 선희를 4차원 여자라고 한다. 그녀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동물들이 아니고 바로 딸이다. 선희가 비록 깊고 따뜻한 사랑은 못 받았지만 베풀어야 할 대상이 있기에 행복을 느끼고 있단다. 선희가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누른다.
“고맙다 연순아, 누군 날 보고 헤어진 남자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그래. 정말 억장 무너지는 소리야. 그런데 58 개띠 친구들은 역시 다르구나.”
“얘는 쓸데없이 남의 눈물샘 자극하네, 내 원 참.” 영균의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어 제켰다.
“자,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밤이 너무 늦었어. 내일 저녁 또 모여야 할 것 아닌가.” 영균의 말에 모두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3. 둘째 날 이야기
가이드의 이야기는 연일 계속되었다. 주변 볼거리며, 다음 행선지의 역사, 유래 등 할 얘기들이 많을 텐데. 그는 고객의 궁금증이 아니라 본인의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기라도 하듯 끝이 없다. 그런데 사실 버스로 지나는 동안 자연 풍광 이외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지우펀 옛거리다. 멀리서 보면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데 버스는 오르고 또 오른다. 종점에 이르자 지우펀에서만 운행하는 버스로 갈아탔다. 동네 안으로 올라갈수록 예스러운 건물이며, 잘 정돈된 골목들이 범상찮아 보였다. 재개발이니 뭐니 해서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우리와 달리 어쩌면 이렇게 잘 보존해 놨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드디어 마을 어귀, 붉은 장식등을 멋스럽게 달고 늘어선 상가들이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4월 초파일 조계사의 연등처럼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골목 오르막은 돌계단이 길게 위로 뻗어있다. 일단 돌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서 다리가 아파 더 이상 못 올라갈 정도가 되면 좌측으로 연결되는 좁고 긴 상가골목이 나타난다. 이곳 특유의 작은 펜시가계, 전통음식이나 남방 과일을 파는 가계, 문구류, 장난감을 파는 가계 등 끝이 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거리에 심취되면 더 좋은 볼거리를 놓치게 된다. 어디를 가나 처마 밑으로 내건 붉은 연등이 우리에게는 사월 초파일 봉축행사 즈음에나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일 년 열두 달 매달려 있다. 골목을 계속 따라가니 버스 정류장 즉 집합장소가 나왔다. 갑작스런 겨울비에 당황했지만 춥지는 않아서 견딜 만 했다.
해넘이가 머지않은 조금 늦은 시간에 야류 지질공원을 찾았다. 공원 입구에서 해변의 지질공원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우리에겐 불필요한 것들이 입구에서부터 진로를 방해한다. 태양은 벌써 수평선을 향해 수직으로 질주하는데 마음만 바빠졌다. 거대한 파도가 일으키는 하얀 포말은 온통 붉은 빛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모두가 중국 색깔이다. 해변을 따라 산재한 조각들 사이로 황홀한 석양빛이 휘감아 돈다.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냈을 화려하고 기묘한 조각품, 대자연의 위대함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오드리햅번이라는 여왕머리(뉘왕터우) 바위, 거북, 사자, 기린 등 동물의 모습도 있고, 좀 떨어져 음미하면 아이스크림, 땅콩, 생강을 닮은 작품들도 있었다.
다음으로 들른 서문정 거리는 우리의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인사동거리와 흡사했다. 이 작은 섬나라에 웬 볼거리가 이다지도 많지? 중국인들은 특유의 돈 버는 재주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중국인들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미래의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혜안을 지닌 듯하다.
저녁을 먹고 나자 다시 온수리 사람들의 밤이 되었다. 언제 준비를 했는지 먹고 마실 것이 한 보따리다. 낮에 차속에서 온수리 팀이 너무 떠든다고 가이드로부터 수차 지적을 받았는데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모습이다. 어제부터 우리 그룹에 부부가 세 쌍이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수상쩍었는지 모씨가 조사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한 쌍만 실제 부부이고 두 쌍은 가짜란다. 말인즉 한 쌍은 서울에서부터 사귀던 불륜이고, 나머지 한 쌍은 대만에 와서 눈이 맞은 사람들이란다. 순진한 선희가 한 마디 했다.
“아니, 그럼 그 사람들 호텔에서 한 방 쓰는 거야?”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영균이 정리에 나섰다.
“자 그럼 오늘도 소주로 한순배 돌리고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오늘은 연순이, 향순이, 정님이 순으로 합시다. 부탁하는데요, 남이 말할 땐 갱생이 끼지 말고 좀 진지하게 듣자고요.”
“그래, 연순이 얘긴 누가 할겨? 자기가 스스로 할 겨?”
“아니지, 자기가 얘기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내가 잘 알잖아. 내가 풀게 뭐.” 정님이가 나섰다. “연순이 얘기는 연애 얘기 빼면 아무 것도 없잖아.” 승호가 토를 단다. 정님이가 말머리 자르지 말라고 승호에게 눈을 부라린다.
(연순이 이야기)
연순이는 그래도 어릴 땐 별 고생 없이 자랐다. 큰 언니, 오빠 셋 해서 모두 삼남이녀 중 막내였으니까 내리 사랑 받으며 자랐다. 아니지, 언니 오빠들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경쟁하며 어렵게 살아남았을 수도 있겠다. 연순이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집안에서 오빠들 학비 대느라 살림이 빠듯했단다. 물론 아버지, 엄마는 힘들게 농사를 지었다. 참깨, 들깨, 콩, 수박농사 등으로 새끼들 학비를 근근이 이어갔다. 그러다가 연순이 차례가 되자 힘이 부쳤다. 결국 연순이는 2년이나 쉬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60년 쥐띠와 함께 다녔다. 동네에서는 나이를 모두 알기 때문에 동급생이라도 반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교를 늦게 다녀서 그런지 사춘기가 빨리 왔다. 온수리에서 삼례 읍내까지 다니는 동안 고등학교 오빠들을 보게 되면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했다. 동네에 은밀한 사건들이 생겨 부득이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서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부쩍 늘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학교에 가려면 온수리에서 마을 저수지를 지나야 한다. 물론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예전엔 서울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평일에도 진을 치고 낚시질을 하곤 했었다. 화려한 옷차림새며, 윤기 흐르는 희멀건 얼굴들, 한번 타보지 못한 승용차 등이 연순이의 호기심을 한껏 부추겼다. 매년 봄이면 저수지 둑을 따라 온갖 꽃들이 탐스러운 꽃망울을 터뜨렸다. 목련과 벚꽃이 지고 울안의 감꽃이 피어날 때면 연순이의 사춘기도 함께 피어나고 무르익었다. 이팔청춘 중학 시절을 간신히 넘었다.
중학을 졸업하자마자 연순이는 진학이 아닌 취업을 선택했다. 자기가 진심으로 원했다면 집에서 고등학교까지는 보내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싫었다. 잘 차려입고 공장이며, 회사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부러웠다. 결국 전주제지 공장에 취업을 했다. 그러자 동네 고등학교 다니던 동창 남자 애가 자기 친구를 연순이에게 소개했다. 남자 아이도 멋있었지만 집안이 괜찮았단다. 동창 말로는 남자애 아버지가 서울 어느 유명회사의 중역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 남자 애는 연순이의 학력이나 직업에 대해선 전혀 개의치 않았단다. 둘은 금세 친해졌고 사랑에 빠졌다. 영화도 보고 벚꽃구경, 단풍구경, 겨울산행 등 바빴다. 둘은 정말 떨어질 수 없는, 아니 떨어지면 죽고 못 사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이를 어쩐담. 남자가 군 입대 통지서를 받아든 것이다. 국가의 부름이니 어쩌겠어. 바로 입영하는 날 아침, 신문에 대서특필 될 정도의 감동적인 드라마가 펼쳐졌다는데. 드디어 그 날, 장정들을 태운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는데, 연순이가 그만 땅에 퍼질러 앉아 신발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단다. 얼마나 크게 울어댔던지 옆에서 군대 가는 아들 배웅하러 왔던 다른 부모가 연순이 때문에 정작 자기 아들 떠나는 것을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연순이 한테 묻더라나. 남편이냐고. 기차가 떠나고 가슴이 좀 진정되니까 멋쩍어지더란다.
그런데 두 번째 드라마를 또 쓰기 시작했다. 바로 연애편지다. 훈련을 받고 춘천으로 배치 받아 갔는데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단다. 그런데 그 남자친구 부대에서 여자친구로부터 받은 연애편지 콘테스트를 했는데 연순이의 남친이 당당히 1등을 했단다.
“얘 연순아! 너 가방끈 짧아서 편지도 못 쓰는 줄 알았는데 뭐라고 썼기에 1등씩이나 한거야? 혹 양으로 밀어붙인 것 아니야?” 선희의 말에 연순이가 펄쩍 뛴다. 자기가 왕년엔 학교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은 못했어도 우수상 가작은 꼭 들었다고 했다.
이어서 연순이의 드라마 제3편이 시작되었다. 남자 애가 입영한 뒤 연순이는 계속 회사를 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회사에서 돌아오다가 왕궁저수지 부근에서 뒤를 미행해온 세 놈의 사내들에게 그만 붙잡히고 말았단다. 바로 인근 황장산으로 끌려갔는데 그 야수 같은 놈들이 번갈아 가며 덮쳤다.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연순이의 모습은 그저 처참했다. 머리는 밤송이요, 옷은 풀과 황토흙 투성이였다. 또 잔디밭에 구른 뒤라 하얀 저고리며 치마는 구겨지고 풀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연순이는 동네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본 동네 한 아줌마가 입을 싸게 놀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서울에 사는 오빠들이 듣고 모두 내려왔다. 결국 그 놈들을 수소문해서 잡아왔다. 하지만 고민 끝에 합의를 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고발해봤자 득도 없을뿐더러 연순이만 웃음거리가 될게 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군대 간 친구에게 연순이를 소개했던 동창 놈이 이 사건이 무슨 자랑이라고 그 친구에게 고자질을 했다는 것이다.
“남자 새끼가 그리 입이 싸서 뭐하니? 그런 놈, 그것을 싹둑 잘라 버려야 돼.” 선희가 핏대를 세운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군대 간 남자 친구가 휴가를 받아 나와서는 모두 입단속을 시켰다는 것이다. 자기는 변함없이 연순이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서 아예 혼인신고를 해버렸단다. 제대 후엔 곧 바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길로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가 키도 크고 예쁘게 생겼단다. 그 남자를 처음 소개받을 땐 집안이 부자라고 들었는데 허튼소리였다고 한다. 남자는 트럭 운전을 했다. 그래도 남자가 착실하고 연순이나 애들한테 잘 한다고 했다. 문제는 연순이었다. 옛날의 바람끼와 노름끼가 도진 것이다. 생활이 궁핍해진 연순이는 몰래 술집에 나갔다. 물론 생활비를 좀 벌어보자는 의도였다. 연순이가 말수 좋겠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후려쳤겠는가. 결국 둘은 이혼을 했다. 그 후 전 남편에겐 여자가 생겼단다. 그러자 딸들이 분기탱천했다나. 아무리 이혼했어도 아버지는 아버지라, 하는 꼴을 그냥 못 봐주겠다는 거였다. 드디어 아버지가 사는 집으로 쳐들어갔다. 어찌했는지 동거하던 여자를 내쫒았다. 그리고는 애들이 나서서 엄마 아빠 사이를 중재했단다. 지금도 계속 합치라고 밀어붙이고 있는데, 딸들 말로는 곧 합칠 예정이라고 했다.
“아무튼 좋은 소식 기대한다. 연순아! 연순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말 열렬한 사랑의 화신이야. 원 없이 산거지.” 정님이 끝을 맺었다.
“다음 타자? 향순이 얘기는 누가 할겨? 순례가 해볼 껴?” 영균의 제안에 순례가 나섰다.
(향순이 이야기)
향순에 대한 기억의 시작은 박 씨네 문간방에서부터다. 향순네 아버지 어머니는 당시 동네 부자였던 박씨 아저씨네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품앗이를 다녔다. 근데 아버지가 문제였다. 세 살고 그러면 정신을 좀 바짝 차리고 더 잘 살아볼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매일 술타령이었다. 향순이는 우리들과는 달리 영신초등학교를 다녔다. 거기는 좀 가난한 애들이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같은 공립인데도 영신은 육성회비가 조금 더 쌌다. 지금 생각하면 몇 푼 안 되는 금액인데 그 때는 왜 그렇게 부담이 되었던지. 아무튼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오수에 있는 잠사공장인지 누에공장인지로 갔다. 그곳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전주시내 어디 순대 만드는 집에서 또 몇 년 동안 일을 했다. 그 후 전주 덕진 팔복동에 있는 제지회사의 식당에 취직해서 일을 했단다. 그런데 그곳 공장의 사내 이발소에서 일하던 여자 미용사가 그렇게 좋아 보였단다. 흰 가운에 희멀건 얼굴 모습이 자기의 모습과는 영 대비가 되었더란다. 그길로 알음알음해서 이발소의 면도사가 되었다고 했다. 향순이는 키도 크고 얼굴도 반반해서 애지간한 남정네들은 혹하고 모두 넘어갔단다. 첫 남자도 그 때 생긴 거고. 결국 이발소에서 손님으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길로 딸 둘을 낳았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특별한 기술도 없이 막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맨날 쪼들릴 수밖에. 게다가 그 놈도 남자라고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고 다녔단다. 원래부터 바람기가 좀 있었지만 향순이 눈에 콩깍지가 끼어 있던 때라 그 사람을 제대로 못 본거였다. 결국 이혼을 했다. 그래도 딸들만큼은 잘 키웠다. 뭐 공부 많이 해서 ‘사’자 직업 가졌다는 게 아니다. 지금은 둘 다 결혼했는데 모두 자기 엄마를 제일로 여기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단다. 큰 딸은 제 스스로 대학까지 나왔는데 얼마 전 결혼했는데, 남편이 어디 공무원이라고 했지? 그런데 사람이 융통성도 있고 가족들한테도 잘 한다고 했다. 둘째는 숙대 앞에서 남편하고 컵밥집을 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꽤 붐빈다고 했다.
“누구처럼 강남에 대궐 같은 집이 있어야만 잘 사는가? 걱정 없이 적게 벌고 적게 먹고 살면서 만족하면 그만이지.” 정님이 덧붙인다.
그 후 향순이는 이발소 하는 남자를 만나 재혼을 했다. 그 남자도 재혼한 처지였는데,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그 아들이 벌써 성장해서 결혼도 했고 충청도 어디에서 부부교사 생활을 하고 있단다. 지난여름 향순이가 남편의 전처 아들 덕분에 강릉 교원연수시설로 놀러갔다 왔다고 자랑했었다. 향순이는 그래도 자기 딸이며 사위들한테는 신세를 안 지겠단다. 그래서 얼마 전 전농동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내외간에 살고 있다고 들었어. 이젠 매주 주민센터에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고 그랬다.
“향순이 말이 그러더군. 지금 남자는 나이 차이가 나서 그런지 오로지 향순이만을 사랑해준다는 거야. 그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어.” 순례가 부럽다는 투로 마무리 한다.
“얘, 향순아! 그럼 요새도 매일 밤 붙어 자니? 부럽다. 향순아.” 연순이가 정말 부럽다는 듯 의뭉스럽게 눈웃음을 친다. “자 이번엔 정님이 차례다. 그런데 정님이 얘기는 승호와 좀 비슷할 것 같다. 누가 할 거야?” 영균의 물음에 승호가 나섰다.
(정님이 이야기)
정님이는 위로 언니가 하나 있다. 그래서 자매지간으로 오직 둘뿐이다. 언니는 중학을 나왔지만 정님이는 초등학교만 겨우 마쳤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건 정님이는 총명해서 공부도 곧 잘 한다고 그랬는데 왜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에게 있다. 정님이 아버지는 신혼 초부터 바람을 피워댔단다. 그런데 상대가 놀랍게도 같은 마을의 창숙이네 작은 엄마였다. 그는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물론 여자가 상처를 해서 홀로되기는 했지만 신혼 초부터 말이 되는가. 결국 애까지 하나 낳았다고 그랬다. 그 아이가 지금 정님이 보다 두 살 아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죽으니까 정님이네가 그 집으로 들어갔단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정님이네 아버지가 허우대는 멀쩡해서 신성일이 뺨쳤다고 했다. 일설에 의하면 여자가 먼저 추파를 던졌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한동네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그 때 그 아이는 커서 지금은 전주 어느 병원의 엑스레이 기사로 일하고 있단다. 아무튼 정님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의상실에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다녔다. 그런데 그것도 적성이 안 맞았는지 금세 때려치웠다. 그리곤 교회에 매달렸다. 사람들 얘기로는 정님이가 목사님보다도 더 믿음이 좋다고 했었다. 한편 언니는 전주 인근 소양에서 기도원을 운영한다고 했다. 말이 기도원이지 그 땐 요양원도 아니고 갱생원이었다. 때문에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정신질환자나 지체부자유자, 또는 오갈 데 없이 버려진 노인들이었다. 요즘 기도원은 돈벌이가 꽤 된다는데 정님이 언니 기도원은 운영 자체가 힘들었다. 그런데 정님이가 들어가 도우면서 조금 숨통이 트였다. 정님이가 관공서 또는 유명단체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기부금을 많이 받아냈다. 바로 그 시기에 남편도 만났다. 정님이 말로는 남자가 꽤 유식해 보여 붙잡았다고 했다. 그 길로 결혼해서 아들만 둘을 낳았단다. 애들이 누굴 닮았는지 둘 다 야구를 했다. 그런데 큰 애는 일찌감치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둘째 애는 대학에 가서도 운동을 했는데 그만 어깨 골절로 중도에 포기했다고 한다. 결국 자식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돈만 무더기로 잡아먹은 셈이었다.
정님이가 결혼한 후에는 큰 동서가 하는 아귀찜 식당에서 함께 일을 했다. 말로는 정님이와 함께 일하면서부터 식당이 더욱 번창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내친 김에 정님은 강남 신사역 부근에 식당 하나를 차려 독립을 했단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식당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돈을 쓸어 담았고, 하루 매상이 삼백만 원을 넘었다니까 믿거나 말거나다. 또 식당이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연예인이며 방송사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도와주던 남편이 죽고 애들도 결혼해서 떠나니까 가계도 급격하게 기울었다. 결국 정님은 언니 기도원으로 다시 돌아왔단다. 기도원 바로 인근에 송광사가 있는데 그 곳에 오는 사람들을 통해 홍보도 하고, 후원자들도 꾸준히 모집해서 잘 된다고 했다. 전에 언젠가 남편이 죽고 식당이 기울어가니까 시아주버니가 전화를 해서 재혼하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왔단다. 물론 거절을 했단다.
“아니, 왜? 앞으로 긴긴 세월을 어떻게 홀로 살려고?” 향순이가 눈을 커다랗게 치뜨고선 묻는다.
“그런데 이건 정님이가 가슴 속에 꼭꼭 숨겨오던 비밀인데, 죽은 남편도 어지간히 바람을 피워댔다는군. 속을 엄청 썩여댄 거였지. 애들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고 혼자만 속이 타들어갔을거 아닌가.” 향순이가 한숨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래, 정님아 고생 많았다. 한마디 해봐라, 이젠.” 정님이 뜨거워진 눈시울을 훔치더니 한마디 했다.
“그래, 나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돈도 벌어봤고, 또 펑펑 써보기도 했어. 때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뒹굴기도 하면서.”
“그런데 말이야, 부와 가난은 종이 한 장 차이야. 있다고 부러워 할 것도 아니고, 없다고 낙담하거나 기죽을 것도 아니야. 다 가지고 있을 때도 마음 한 곳은 늘 허전하기만 했으니까. 지금 난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 있기 때문이야.” 정님이가 도통한 듯 한 얼굴로, 아니 부처님 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마무리 했다.
4. 셋째 날 이야기
대만의 날씨가 예측 불가능하다더니 정말 변덕에 죽 끓듯 수시로 변했다. 비가 오다 맑아졌다를 반복했다. 화련 태로각행은 즐거운 기차여행 길이다. 대만의 기차는 어느 정도 수준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슴이 설레었다. 역시나 한국의 KTX 수준엔 훨씬 못 미쳤다. 하지만 주변 풍경만은 빼어났다. 이곳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철로변은 사실 너무 잘 다듬어놓아서 획일적이라 볼거리가 부족하다. 네 시간 만에 도착한 화련, 아직은 자연의 살 냄새가 풋풋한 작은 도시다. 하늘은 무슨 색깔을 띠고 있을까? 지척에 웅장한 산도 없는 이 도시는 무엇을 품고 있을까 궁금증이 인다. 회색빛 하늘에선 여전히 빗방울이 굵어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먼저 칠성담 해변공원을 찾았다. 너무나 잘 정돈된 해변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따금 거센 파도가 밀려와 해변에서 부서질 때면 하얀 포말이 마음속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간다. 가이드는 검고 작은 조약돌들이 이곳 해변의 볼거리라고 이야기 한다. 오히려 부근 상점에 전시된 수석이 눈길을 끈다. 자연이 만들어낸 일부 수석에는 사람이며 새들의 모습이 들어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이어 신이 만든 작품이라는 태로각 협곡 구경에 나섰다. 이곳은 타이루거 협곡을 따라 이루어진 거대한 국립공원이다. 높이 깎아지른 듯한 산중턱 협로를 따라 버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힘겹게 오른다. 길고 좁은 터널의 천장은 버스의 지붕이 닿을 정도로 낮았다. 옛날 시골 아이들 머리 깎아놓은 듯 울퉁불퉁한 천장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다이아몬드처럼 예리한 바위 모서리들이 곳곳에서 검은 마귀처럼 할퀴려 덤벼든다. 초행길 외지인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이곳의 터널들은 장개석 전 총통 시절에 사람들을 동원해 만들었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부분 징과 망치로 불과 4년 만에 뚫었다고 하니 기적같은 작품이렸다. 이어 90도에 가깝게 깎아지른 절벽을 사이에 두고 깊은 협곡이 펼쳐졌다. 인공이 아닌 자연의 작품이라니 그 위엄에 입이 벌어진다. 협곡을 잇는 좁은 다리는 엉덩이 밑이 시큰 할 만큼 겁을 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이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감탄할 따름이다. 수십 길 아래 계곡 밑으로는 거센 회색빛 물결이 굉음과 함께 소용돌이 처 흐른다. 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폭포수나 계곡물 모두 아름답기보다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오직 태곳적 원시를 향해 쏜살같이 내달릴 뿐이다. 연거푸 뒤따라오는 차량들은 아랑곳없이 여자들은 그저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다. 보기에도 오싹한 석회석 물의 여운이 버스 속에서도 계속 머릿속을 맨 돈다. 산과 계곡을 찾아 왔는데 손발을 담그고 마실 물이 없다는게 말이 되는가. 신이 내린 자연, 인공적으로 손대지 않았어도 찾아가면 품어주는 곳, 금수강산, 바로 한국의 산이다. 혹 자연에 도전한 인간 열전을 보고 들으러 온 건 아닌지.
캄캄해졌는데도 그 험한 산중에서 내려갈 생각들을 안 한다. 오를 때 아찔했던 절벽들이 연상되어 걱정이 앞섰다. 밖은 검은 장막으로 둘러친 듯 칠흑 같고 갈 길은 까마득한데 가이드는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역까지 되돌아 내려왔다. 타이베이를 향해 기차로 4시간을 또 달려야 한다. 밤 12시 이전에 도착하기는 애시당초 글렀다. 열차에 오른지 30분도 안되어 내부가 조용해졌다. 온수리팀들은 의자를 돌려 서로 마주하고 앉았다. 대신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었다.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고 이웃에 대한 배려였다. 맥주를 한순배 돌린 후, 영균이 조용히 입을 뗐다.
“자, 두 사람 남았는데 마저 들어보는 게 어때? 어차피 세 시간은 더 가야 되는데” 모두가 동의를 한다. 순례 차례가 되자 선희가 대신해서 나섰다.
(순례의 이야기)
“순례는 우리 집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살았으니까 내가 잘 알아.” 순례와 영균은 육촌간이고 선희와도 완전히 남남은 아니다. 순례네 아버지는 쌍둥이인데 아버지는 동생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쌍둥이를 낳고 혼자가 되었다. 그러니 두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억척스럽게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할머니는 큰 아들에게만 돈을 주었고, 둘째 아들인 순례네 아버지에게는 소홀히 했단다. 결국 아버지는 혼자 자립할 수밖에 없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순례는 형제간이 많다. 오빠가 둘, 언니가 둘, 남동생이 둘이다. 순례는 다섯째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삼례 읍내에 있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했는데, 사실 꼬마둥이라 배울게 없어 얼마간 다니다간 때려쳤다. 그 후 팔복동에 있는 BYC 공장에 취직을 했다는데, 아주 단순한 포장일이었다. 몇 푼이나 받아겠어 단순한 일인데. 그래서 이번엔 동네에서 농사를 하면서 주말이면 교회를 열심히 나갔다네. 그렇다고 순례가 믿음이 좋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그리웠던게지. 바로 효과가 있었다. 그 교회에서 창숙이 둘째 오빠를 만나 눈이 맞은 것이다. 무슨 연애 같은 걸 제대로 해본 것도 아니었다더군. 시골에서 눈 맞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길로 무언가 생기고 둘의 인생은 꼼짝없이 서로 묶이는 것이지. 결국 둘은 결혼을 했다.
순례 신랑은 중학을 중도 포기했는데 이유가 있다고 했다. 글쎄 창숙이 아버지가 전기 아낀다고 저녁에는 불을 켜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일찍 자라는 거였다. 그러니 공부와는 진작부터 담쌓다. 그런 와중에도 순례 큰 오빠는 상고까지 나왔다고 했으니 이것은 형제간에 분명한 차별이렸다. 사실 장남은 제사를 맡아야 하니까 조금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순례는 결혼하고서도 따로 제금난 게 아니고 시댁, 그러니까 창숙이네 집에서 함께 살았다. 문제는 온수리에 살면서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돌아오는 게 없었다.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로만 돌아가는 구조였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보따리를 들쳐 메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도 시골의 시아버지는 큰 아들만 도와주지 작은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혼자 각종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정말 뼈가 부서져라 일을 했다. 순례도 온갖 식당 일을 찾아다녔고. 아마 그 때 정님이네 식당에서 잠시 일을 했단다. 그 후 시뉘인 창숙이의 권유로 개봉동으로 이사 오면서 신랑이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순례도 도시락 공장에 다니면서 일을 했고. 부모가 뼈 빠지게 열심히 일하니까 자식들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들은 육사에 들어갔는데 승승장구 하고 있단다. 아들이 잘 생겨서 처음엔 무슨 스튜디어스 하고 연분이 나서 잔뜩 기대를 했었단다. 잘 되나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헤어졌단다. 그 후 성남에 근무하면서 지금의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외대를 나온 군 장교라고 했다. 처음엔 여자 쪽에서 순례네 집안이 빈털터리라고 싫어했단다. 그저 돈이 문제다, 어딜 가나. 기특한 것은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자기 아빠 공사판 일하는 데를 따라다니면서 같이 일을 했단다. 그러니까 애가 뭔가 돈을 벌고 출세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체험한 셈이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순례 신랑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글쎄 운전을 하면서 술을 마셔댔다고 한다. 전에도 몇 번 걸려서 집행유예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얼마 전에 또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다. 그 길로 면허 취소에 나라에서 주는 밥을 먹으러 큰 집으로 들어갔단다. 문제는 전에 받은 집행유예 형기가 살아난 것이다. 그 놈의 술, 절제가 안 되는 건가. 아들은 지금 중령이 되어서 대전에 근무하고 있단다. 기특하게도 며느리는 동구권인가 어디로 유학을 갔는데, 애들도 다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하고 며느리가 아버지 일을 알까봐서 애들한테는 쉬쉬 하고 있단다. 순례의 둘째 애가 딸인데 그 애는 간호사로 병원에 취직해서 잘 다닌다고 했다. 딸도 나이가 꽉 찼는데 좋은 자리가 있으면 중매 좀 해달고 부탁을 했다.
“남들은 자식들이 취직을 못해서 웬순데, 순례네는 자식이 아니라 남편이 웬수인 거지. 그래도 사람이라는 게 모든 걸 다 갖추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 하면서 살아야지.” 정님이의 말에 순례가 말을 받는다.
“맞아, 남이 볼 땐 그렇지만 시방 나에겐 하루하루가 고통이야. 추운 교도소 바닥에서 고생하고 있을 남편 생각하면 한 시라도 맘 편할 때가 없어. 남편이 교도소에서 주는 멀건 국에 반찬 두어 개 놓고 밥 먹을 생각을 하면 나도 똑 같이 고통 받는 거지.”
“그 원수가 지금 이처럼 생각하는 순례의 절절한 마음을 알기나 할까.” 승호가 덧붙인다. 아직 타이베이까지는 한 시간도 더 남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잠을 청했는지 조용했다. 이따금 온수리 팀의 시끄러운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항의는 하지 않았다. 가이드는 어디에 있는지 코빼기도 안 비친다. 그래도 남의 눈치를 보는 영균이 톤을 낮추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맥주 한순배가 다시 돌았다. 영균이 말을 잇는다.
“향순이 친구 영숙씨는 강릉에서 왔지만 이번 여행에 동참한 거니까, 우리 온수리 사람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지금까지 우리들 얘기, 아니 온갖 치부를 다 들어 내놨는데 영숙씨의 진솔한 얘기도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영숙씨 괜찮겠습니까?” 한참 뜸들이던 영숙이 피할 수 없음을 알았는지 소주 한 잔을 청해 마신다.
“사실 향순씨와 가깝기는 하지만 저의 깊은 속내까지는 아마 모를 겁니다. 제 얘기는 제가 하겠습니다.”
(영숙이의 이야기)
영숙은 강릉에 살고 있지만 원래 고향은 화진포다. 아버지 고향은 함경도인데 1.4 후퇴 월남할 때 멀리 못가고 휴전선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어릴 땐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산을 일궈서 감자며 옥수수, 고랭지 채소를 심었다. 영숙은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모두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단다. 배운 만큼 누린다고 했다. 큰 오빠는 아버지 농사일을 돕다가 누가 옆에서 부추겼는지 심마니의 길로 나섰단다. 친구들과 함께 인적이 드문 전방지역의 깊은 산속을 휘젓고 다녔다. 처음 얼마간은 수입이 괜찮았단다. 당시만 해도 산삼뿐만이 아니라 귀한 약재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욕심이 과했는지 그만 지뢰지대 푯말을 보지 못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단다. 동행한 친구가 지뢰를 밟았는데 옆에 있던 오빠까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 길로 영숙은 생업 전선에 나섰다. 처음엔 강릉에 있는 음식점에 취직을 했다. 그곳은 관광지라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부엌 허드렛일을 했는데 어린 영숙에겐 정말 중노동이었다. 생선가계에서 막일을 하기도 했지만 쉬운 일이 없었다. 그 때 아버지는 농사일을 접고 작은 어선을 탔다고 했다. 그런데 그 흔하던 우럭, 도미, 오징어 등 어종이 줄어들자 멀리 나가기 시작했단다. 결국 아버지는 태풍에 휩쓸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당시 고등학교 다니던 작은 오빠는 공부를 때려치우고 그 길로 인제에 있는 황태덕장에 취직을 했다. 황태는 주로 한겨울에 하는 작업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칼바람 추위 속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던지 모은 돈으로 조그만 생선가게를 열었다. 물론 큰돈은 못 벌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그 길로 결혼도 했고, 지금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단다.
그런데 영숙은 머리를 굴렸다. 사춘기가 지나자 관광지의 못된 풍경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쳐온 것이다. 쉽게 돈 버는 여자들을 보면서 빨리 돈 버는 방법에 눈이 뜬 것이다. 그녀의 소박한 꿈은 얼른 돈 벌어 엄마, 오빠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소개를 받아 강릉의 어느 룸살롱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이 그렇게 녹녹한 곳이 아니었다. 버는 것보다 쓰는 게 훨씬 많았다. 몸도 망가졌다. 내친 김에 뭇 남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모 기업 강릉 지사장과 태국을 놀러간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향순씨를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그 길로 계속 나아갔다. 아예 매춘업소를 차렸다. 그 때 돈을 상당히 벌었다고 했다. 지금은 강릉에서 영덕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리 신통치 않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부추기기를 더 나이 들기 전에 돈 많은 사장 골라서 노후를 대비하라고 한단다. 그런데 이처럼 굴러다니며 막장생활을 하다 보니 누군가에게 억매이기가 싫어졌단다. 앞으로 지치고 병들면 요양원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영숙의 모토는 ‘후회 없는 오늘’이라고 했다.
“참 열심히 살아냈군요. 그럼 정말 아무런 욕심이나 소원이 없단 말씀인가요?” 정님이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요, 엄마랑 함께 살고 싶죠. 그 동안 너무 바닥으로만 돌아다니면서 가슴 없는 삶을 살아왔거든요.”
5. 마지막 날 이야기
이제 겨우 4일째인데 벌써 마지막 날이다. 장개석 기념관과 사저를 중심으로 계획된 일정에 원산대반점이 추가되었다. 매일 아침 타이베이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황금색의 독특한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곤 했다. ‘원산대반점’ 지금은 ‘그랜드 호텔 타이베이’라고 했다. 모든 이들이 궁금증을 자아내자 가이드가 선뜻 안내하겠다고 인심을 썼다. 가는 도중에 먼저 들린 곳은 충혈사였다. 이곳은 중국내전과 항일운동 당시 전사한 군인과 열사들의 영령을 모신 곳이라 했다. 우리로 말하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른 아침 열리는 경비병교대식이 볼거리라고 했다. 아침 일찍 서둘렀는데 벌써부터 많은 인파가 장사진을 쳤다. 그 바람에 사람들의 뒤꾹지만 바라봐야 했다. 그런데 복장이나 의식을 보니 그렇게 호기심을 유발할 만큼 화려하거나 다양하지도 않았다. 정식 군인이 아닌 듯 싶었다. 우리의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이 오히려 더욱 흥미로운 볼거리로 생각되었다.
이어서 국립중정기념당을 찾았다. 이곳은 장개석 전총통의 기념관이다. 각종 유품이외에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대규모의 정원, 위압감을 줄만큼 거대한 건축물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기념관의 크기만큼이나 그가 사람들의 진정한 존경을 받고 있을까? 중국 본토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홍콩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대만 입장에서 장개석은 분명 침략자일 텐데. 이어 방문한 사림관저는 장개석 전총통의 관저였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방대한 면적에 펼쳐진 아름답고 웅장한 수목원이다. 야자수, 백천목 등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은 되었을 듯한 거대한 수목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탐방로를 따라 잘 가꾸어져 있다. 원래 일제 강점기의 원예원을 관저로 바꾼 것이라는데 관저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진입로 주변에 늘어선 기념품 가계며 식당들은 찾는이를 더욱 즐겁게 했다. 어느덧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짙게 깔린 회색 구름은 화창한 대만의 하늘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했다. 사진찍기에도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그래도 정원 내 곳곳에 배치된 조각품들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보는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곳곳에 펼쳐진 짙푸른 잔디 위로 스프링클러의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다. 방문객의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마지막 코스는 ‘그랜드 호텔 타이베이’였다. 황금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빌딩, 북경의 자금성을 닮았다 한다. 미학적으로 본다면 그다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유별나게 튀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범인은 접근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마치 비밀스러운 뭔가가 숨겨져 있는 고급 관청이랄까. 아니면 정보를 다루는 중앙정보부나 기무사 정도의 냉기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신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후에 대만의 신궁이 되었고, 마지막엔 장개석 전 총통 부인의 영빈관이 되었다고 한다. 내부 곳곳에는 각종 문양과 유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홀의 규모에 놀라고, 천장에서 노려보는 황금색 용 문양의 위용에 또 한 번 놀란다. 용과 황제,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중국 특유의 전통문화와 토속신앙이 물씬 풍겨온다. 이곳 호텔에는 세계 지도자급의 유명 정치인이나 세계 수준급의 재계 총수들 그리고 연예인들이 찾아와서 묵는다고 했다. 과연 이곳에서 저녁에 냄새 폴폴 나는 라면은 끓여먹을 수 있는 걸까? 도대체 하룻밤 묵는데 비용은 얼마나 들까? 듣기로는 명성에 비해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고 들었는데 사실일까? 내부 어디를 가나 붉은 카펫이 끝을 모르고 이어간다. 벽면에는 한자로 쓰여진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보는 이를 위축시킨다. 편안함 보다는 신기함과 이국스러움, 따뜻함 보다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앞선다. 호텔이라기보다는 관광코스의 볼거리로 적격이다. 입구에서 젊은 악사 두 명이 중국의 전통 악기로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한다. 많은 방문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일정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공항으로 이동했다. 출발시간까지 3시간도 더 남은 공항 안에서 온수리 사람들의 마지막 수다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한 사람, 그는 온수리 사람은 아니다. 바로 가이드였다. 그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거지를 보면 그는 한국인이다, 아니다, 중국인 특유의 냄새가 난다. 신빙성도 없는 말들이 두서없이 난무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을 모아보면 대충 이랬다.
(보혜씨 이야기)
가장 큰 궁금증은 우선 그의 나이였다. 도대체 사십 대인지 오십 대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아마도 그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젊게 사는 비결은 아닐까? 그는 서울의 중구 명동에 있는 중국대사관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명동의 유명한 양복점 재단사로 일했는데 돈을 상당히 벌었다고 했다. 60년대에 외제차를 끌고 다닐 정도였다니 내로라하는 재력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이드가 어렸을 적엔 사립 유치원과 사립 초등학교를 다녔고, 부러울 것 없이 유복했단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인임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은 복이 넘치면 항상 마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아버지가 마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나. 처음엔 일시적인 소일거리 내지 취미로 어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노름은 일종의 마약이다. 결국 마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전 재산을 거덜 내고야 말았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까지 나빠지면서 양복점을 닫고야 말았다. 이때부터 가정불화가 시작되었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린 아이들 앞에서 참 많이도 싸웠단다. 나중엔 아버지가 폭력까지 휘둘렀다니 어린 자식들이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가세는 더욱 기울어가고 하는 수 없이 청량리 부근으로 이사하여 중국음식점을 열었다고 했다. 그런데 맛이 별로였는지 손님이 늘지않아 근근히 명맥만 유지했단다. 보혜씨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이 여의치 않자 아버지 식당에서 일을 도왔다. 아버지의 경영전략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님 요리사가 문제였는지 결국 문을 닫고야 말았단다. 또 다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상계동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의 상계동이란 전형적인 빈민촌이었다. 판자촌, 루핑집, 초가집 등등, 다닥다닥 붙어있어 불이라도 난다면 그 끔찍함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구조였다. 식수도 문제였지만, 불편의 극치는 역시 공중화장실이었다. 결국 보혜 청년은 돌파구 마련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각 종 잡일을 하면서 공부도 하고 취직자리도 찾아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일본사회가 그리 녹녹한 게 아니었다. 혼내,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내가 다른 게 일본 사람들이다. 그는 다시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대만 사이가 원활하고 매우 우호적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대학을 나왔다. 그 때는 한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올 때였으므로 가이드로 부업도 하고 공부도 했다. 여행가이드 활동이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돈도 꽤 벌었단다. 그러나 한국과 대만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자 양국 관계는 급랭하기 시작했다. 그의 위치마저 불안스러웠다. 그는 그 길로 중국 청도로 들어갔다. 청도는 아버지의 고향인데 전부터 아버지는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소망을 계속 내비쳤다고 한다. 그런데 낯설기만한 아버지 고향, 청도에서 그의 인기가 엄청 치솟았단다. 특히 신랑감으로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선 볼 처녀들이 줄을 섰다고 했다. 미인은 물론이거니와 재력가의 집안까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성들이 몰리는 바람에 번호표까지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하여간 하루에 수십 명씩 며칠간을 선을 보았다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다. 결국 제일 예쁜 부잣집 아가씨를 선택해 결혼을 했단다. 이 후 대만에서의 활동으로 아버지 고향인 청도에 집까지 마련해 드렸다고 한다. 지금은 온 가족이 타이베이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단다. 그런 가이드가 조심스레 한 말이 있다.
“이 노릇도 이젠 나이 먹으니 만만치 않아요. 왜냐면 한국에서 온 극히 일부 관광객들은 아직도 가이드를 얕잡아보거나 반말을 하는 등 안하무인격입니다. 또 팁이나 좀 쥐어주면 모든 게 다 되는 줄로 알아요.” 그러면서 넌지시 일본 관광객들의 예의바른 매너를 흘렸다. ‘극히 일부’ 그는 여행객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단어 사용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실은 절반은 되는 것 아냐?” 영균이 덧붙인다. 아무튼 그는 대만에서 한국인을 상대로한 독보적인 관광가이드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굳힌 것만은 틀림없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까지 함께 하고 있어서 일하는 즐거움도 생기고 삶의 목적도 분명해진 듯 했다.
6. 해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모두가 지쳐 떨어졌는지 조용했다. 공항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도 서울의 날씨는 역시 매서웠다. 사람들은 두터운 외투부터 꺼내 입는다. 수화물 컨베이어벨트 앞에 짐을 찾으러 모여들었다. 헝클어진 머리며, 얼굴, 옷매무세가 언젠가 거리낌없이 속내 들춰보이던 온수리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짐을 찾은 후 모두가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처음 만날 때처럼 헤어짐도 간단했다. 연순이는 두 딸이 이 늦은 시간에 마중을 나왔는지 서로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대만 기행이 각자 인생살이에 얼마나 즐거운 방점으로 찍혔을까? 안개 자욱한 인천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모두가 밖으로 나왔다. 세차게 불어오는 북풍 칼바람에 모두가 고개를 외투 안으로 처박았다. 그리곤 인사할 겨를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차가 끊긴지 이미 오래다. 그래도 그들은 익숙한 듯 짙은 어둠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마도 새벽이 밝으면 그들은 고희 때 만나 할 얘기들을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일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온수리의 꿈은 여전히 잉태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