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외기러기 정종량 민수는 업무가 끝나자마자 경식의 병실을 찾았다. 그는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기 때문이다. 흡사 야전병원을 방불케 하는 외과병실은 6인용으로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왔다. 칸막이가 처진 침대마다 보호자가 있기도 하고 어떤 곳은 환자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느라 힘들어했다. 커튼 밖으로 드러난 환자들을 보니, 팔과 다리에 석고를 하고 있거나,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환자는 머리를 아예 붕대로 칭칭 감아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경식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자, 맨 안쪽 침대 옆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혹시 박민수 씨 아니냐고 묻는다. 민수는 그녀가 누군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경식이가 여러번 말한 혜민 씨라는 걸 직감할 수 ..
마지막 차례 정종량 벌써 2018년의 원단이다. 구정에는 원래 떡국을 만들어 차례를 지내지만 우리집은 기제사처럼 온갖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일 년 열두 달 그때 그때 찾아서 일일이 모실 수 없기 때문에 구정을 통해 한번에 드린다. 이것은 어머니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온갖 질병을 다 갖고 하루하루를 버티신다. 어머니 말로는 조상님 귀신들이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게모르게 굿도 수 차례 했다 바로 밑에 동생이 미신이라고 완강하게 반대하니까 그 밑에 동생에게 부탁해서 결국 외지에서 치뤘다. 그 때는 어머니 고통이 조금 완화되는 효과가 있었다는데 또 다시 조상님 귀신이 달라붙는다고 하신다. 이러한 연고로 우리집의 제사는 결코 소홀히 할 수가..
58년 개띠들의 대만 기행 정종량 1. 작당 매서운 한파가 휘몰아치는 11월초 익산군 왕궁면 온수리 사람들 8명이 40여 년 만에 만나 해외여행 길에 나섰다. 이들은 동네 친목계 모임의 회원들로서 모두가 그 유명한 58년 개띠들이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같은 초등학교 출신들은 아니다. 대부분이 삼례초등학교 출신들인데 몇몇은 영신초등학교 출신도 있다. 집안이 조금 못사는 아이들은 당시 영신초등학교를 다녔다. 때문에 그때는 어린 마음에 상처도 입었고, 어쭙잖은 자격지심에 서로가 냉랭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온수리’라는 고향 마을로 인해 한마음이 되었다. 이들의 행선지는 대만이다. 그렇다고 여행이 미리부터 계획된 건 아니다. 오랜만에 모이다 보니 누군가가 기왕 모이는 것 해외여행으로 하면 어떨까하는 ..
썬플라워 정종량 1. 명호의 죽음 연말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 예년 같으면 각종 송년회 모임으로 정신없을 때이다. 금년엔 예기치 못한 강추위가 너무 일찍 한반도를 덮치는 바람에 즐거운 동창회 모임도 부담이 되었다. 아무튼 황금연휴를 앞두고 현철은 큰 용기를 냈다. 이번 연말연시에는 일본의 오사카 온천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마음이야 늘 품어왔지만 아이 둘을 연년생으로 대학 보낸다는 게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 큰 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이제 겨우 한숨을 돌렸다. 아직 퇴근시간까지는 십 여분이 남아있는데도 직원들은 벌써부터 책상을 정리하고 외투까지 입은 채 서서 웅성거린다. 연말이라 그런지 모두가 들떠있다. 그래도 팀장인 현철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인터넷을 검색했다. ..
흠, 눈이라도 오려나? 하늘은 회색빛 구름을 가득 안고 있다.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대모산을 향해 전철을 탔다. 평일에 배낭을 메고 차에 오르면 이상하게 미안하다. 남들은 열심히 일하러 또는 공부하러 가는데 나만 여유부리며 노는 것 같아 눈치 보이기 때문이다. 2호선으로 갈아탄 신도림역은 사람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배낭을 등에서 내려 조용히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 아침 9시 반이 넘은 시간인데도, 젊은이들이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거나 핸드폰 게임에 정신이 없다. 정상적인 광경인지 모르겠다. 어느덧 선릉에서 분당선을 갈아타니 금세 대모산역이다. 회장과 분당에 사는 고과장 등 세명이 길을 나섰다. 대모산입구역 7번출구를 나와 일원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아침 햇살이 빗살처럼 퍼져나간다...
군시절과 경순왕 묘 지난 11월초 우리 소설쓰기반 학생들과 차 한 잔을 하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경순왕 이야기가 나왔다. 아 그랬지, 강선 작가님이 역사소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해서 나온 얘기였다. 갑자기 휴전선 근무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우리 아들도 제대한지가 한참 지났으니 참으로 까마득한 옛날이다. 사실 난 논산에서 전반기 훈련을 받고, 25사단에서 후반기 4주 훈련을 마친 후 자대인 파주 장파리에 배치되었다. 배치되고 한 달여 만에 철책선에 교대 투입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임진강 건너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리다. 이곳 철책선 생활은 소대 단위로 배치되어 타 소대 막사가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있던 소대는 주변에 높은 산은 없었지만 뒤로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속성(屬性) 정종량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에 남현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겨우 한시다. 지금 이 시간에 올 전화는 시골에 계신 어머님일텐데, 무슨 일일까? 조금은 불안스레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오주임님, 큰일났습니다. 지금 빨리 나오셔야겠어요. 흑인 애들이 사고를 쳤습니다.” 남현의 팀장 목소리였다. Y대에 위탁교육 중인 흑인 학생들이 신촌로타리 부근 술집에서 사고를 쳤는데, 술집 종업원이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종업원은 즉시 119 엠블란스로 서대문 로타리에 있는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갔고, 흑인 학생들은 신촌로타리로 도망치다 시민들에게 붙잡혀 서대문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오주임님, 이거 사표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 "참"은 단편이지만 읽으면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앙금을 남기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는 실제로 의대를 졸업한 의사입니다. 그래서 의대와 병원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진영은 예방의학을 전공하고 타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한 후 그 대학에 잔류합니다. 즉 시간강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영은 그 곳 교수(최교수)는 물론 다른 강사들과도 융합이 어려운 면이 있고 보이지않는 따돌림도 엿보입니다.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자가 갑작스런 폐렴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다른 수감자가 이를 국가인권위에 진정합니다. 따라서 진영은 이 진정인을 만나 면담을 하고 교도소내 시설들을 점검한 후 교도소의 의무과장을 만나 의견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나 면담 과정에서 진영은 수감..
그들도 역시 남자다 세네갈 여성의 의상은 아프리카 어느 인종 보다도 다양하고 화려하다. 멀리서 보면 우리의 색동저고리를 연상시킨다. 흰색,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등 원색의 옷을 즐겨 입는다. 그러나 디자인은 다양하다.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로 등과 가슴이 깊게 파인 블라우스를 입는가 하면, 얼굴만 내민 채 몸 전체를 꽁꽁 동여맨 스타일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치맛단을 길게 입는다. 물론 직장 여성들은 짧은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다. 공식 석상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대부분 흰색이나 푸른색 또는 붉은색의 전통 의상을 선호한다. 세네갈의 여인들은 아프리카 인종 중에서 가장 몸매가 아름답다. 체격도 크거니와 몸의 전체적인 구조와 비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복장은 여전히 이슬람의 규율..
어머니, 이젠 우리 엄마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벌써 구십하고도 셋이다. 어지간하면 요양원에 들어가실 연세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아직은 정신적으로는 멀쩡 하시다. 지난번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의결 때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2 이상 의결 즉 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는 걸 알려드렸는데 정확하게 기억하셨다. 그 후 헌재에서 역시 3분의 2 이상인 6명의 재판관이 찬성해야 한다고 알려드렸는데 모두 기억하셨다. 사실 동생들도 건성으로 알아서 젊은 애들도 잘 모른다. 그런데 어머니는 기억력 만큼은 쇠퇴하질 않으셨다. 그뿐 아니다. 집안 냉장고에 들어있는 먹거리 뿐만 아니라 부엌에 있는 세간도 빠짐없이 모두 외우신다. 물론 허리가 휘어 지팡이를 짚으신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무릎 관절이 아프고 발이 ..